暝想-書

순간에만 찾아 드는 진리 - 아디야 샨티

눈내리는 새벽 2017. 10. 3. 20:35

그냥 태양을 찍어보았어요

 

 

 

 진리

진리는 오직 이 순간에만 발견 되는 것입니다. 
다음 순간이나 내일, 내년으로 미뤄질 수 있는 진리는 없습니다.
기억은 결코 진리를 담고 있지 않습니다.
그것은 다만 과거이자 죽은 것이며, 사라진 것입니다.


진리는 싱싱하게 살아있는 

無慾한 마음(non-seeking mind)에 찾아듭니다.
그 것은 당신이 가지거나 쌓아두거나 

붙잡을 수 있는 어떤 것이 아닙니다.

 

 

 

 

진리는 마음이 침묵하고 

스스로를 주장하지 않을 때 활짝 드러납니다.
당신은 진리를 억누르거나 길들일 수 없습니다.
만약 그렇게 한다면 진리는 그 즉시 죽어버리고 맙니다.


진리는

마음의 움직임에 이 생기 길... 기다리며

未知(the unknown) 주변을 서성입니다.

그래서 틈이 있을 땐 진리는 

아는 것에서 미지의 것으로 도약합니다.


그 때 당신은 곧바로 진리를 이해하고 

신성함을 자각하게 됩니다.
번개 같은 일별은 시간의 영원성을 부수고,

진리의 현존은 이 순간을 비춥니다.

진리는 순수한 마음에 

축복과 성체로 다가옵니다. 


그리고 진리는 신성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고가 스스로에게서 자유로울 수 있게 해 주고,

안팎으로 인간의 가슴을 비추어 주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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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적인 에고의 우월감에 대하여...>

 

깨어남 이후에 가장 흔히 나타나는 망상 중의 하나는 우월감이라는 망상이다. 

이 것은 영적인 집단에서 매우 흔히 나타난다. 

사람들은 깨어나 있든 그렇지 않든 어떤 우월감 속에 빠져들 수 있다. 

 

그것은 '스쳐 지나는 깨어남'으로부터 '머무는 깨어남'으로 옮겨갈 때 겪게 되는 

함정일 수도 있고, 꿈꾸는 상태 속에 있는 함정일 수도 있다. 

그러나 깨어남 이후의 경우엔, 에고의 마음이 버젓이 걸어 들어와서, 마치 깨어남으로 하여 

자신이 남보다 더 훌륭해지기라도 한 것처럼 개인적인 우월감을 느끼기 시작한다. 

이런 경우는 너무나 흔해서 거의 수행 과정의 자연스러운 일부처럼 느껴질 정도이다.


이러한 망상 속에 내재되어 있는 것은, ‘뭔가를 안다’는 느낌이다. 

나는 옳다. 깨어났으니까. 나는 ‘언제나’ 옳다. 깨어났으니까. 

꿈꾸는 상태라는 집의 건축주인 에고는 그러한 생각을 가지고 (내가 명명한) 

‘깨달은 에고’라는 상태를 창조해내기 시작한다. 

깨달은 에고만큼 정떨어지는 것도 없다. 

그것은 ‘나는 깨달았다’ 혹은 ‘나는 깨어났다’라고 생각하는 에고이며, 

깨어남의 실현으로 얻어낸 얼마간의 에너지를 가지고 

또 하나의 우월한 자아의 느낌을 지어내는 에고이다.

나는 그동안 확실한 깨어남의 순간을 경험한 사람들이, 

그 깨달음을 자기가 직면하기를 원치 않는 

모든 것을 무시해버리는 데에 이용하는 것을 보아왔다. 

 

사람들은 내게 이렇게 말했다.

“아디야, 하지만 여기엔 에고가 없어요. 

‘나’라는 게 없다 이 말씀입니다. 

‘나’가 없으니 아무 것도 할 게 없는 셈이죠

.

" 그들에게 내가 묻는다. 

“좋습니다. 그래도 당신은 가끔  무의식적으로 꿈틀거리는 

불가사의한 움직임도 당신 안에 존재한다는 건 알고 있겠죠?” 

그러면 그들은 말한다. “글쎄요, 그건 맞을지 몰라도 

그런 현상에 대해 반응할 누군가가 없다는 거죠. 

이 모두가 저절로 펼쳐지는 현상이니까요. 

 

어떤 식으로든 거기에 관여할 생각을 낸다는 것 자체가 

또 다른 꿈속의 망상이지요." 

이런 공간, 즉 모종의 통찰을 붙들고서 

자신을 숨겨 줄 공간으로 빠져 들어가 버린 사람은 

거기까지 뚫고 들어가서 만나기가 어렵다. 

진정한 깨어남의 상태에 있을 때는, 우리는 결코 자신이 깨달은 바를 

자신의 어떤 면으로부터 회피하는 수단으로 사용하지 않는다. 

 

우리는 모든 것을 존재의 빛 속으로 맞아 들인다. 우리가 혹시라도  무의식적으로 해대는 

자신의 행동을 간과해 버리는 수단으로서 깨달음을 이용하고 있다는 걸 알게 되면 

그 즉시 자신이 지금 미혹된 상태에서 행동하고 있음을 알아차려야 한다.

 

이미 말했듯이 사물에 대한 절대적 관점은 옳은 것이다.

따로 분리된 ‘행위자’는 없다는 것, 에고는 환영이라는 것 말이다. 

궁극적으로, 무언가를 ‘하는’ 분리된 존재는 없다. 

그리고 모든 것은 자발적으로 일어난다. 그러나 그보다 더 깊은 진실이 존재한다. 

이 진실에 문제가 있다면, 그것을 말로 설명하기가 몹시 힘들다는 점이다.

 

불교에 반야심경이라는 경전이 있다. 여기에는 ‘늙음도 없고 죽음도 없으며, 

늙음과 죽음이 다함도 없다’는 내용이 있다. 이것은 이 경전에서 대단히 중요한 구절이다. 

늙음도 없고 죽음도 없다. 절대적 관점에서 볼 때, 이것은 진실이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가 늙음과 죽음에 끝이 없다는 것을 깨닫지 못할 때, 

우리의 깨달음은 완전하지 않다. 깨달음이 완전하지 않으면 

그 깨달음은 에고에 의해 자신을 숨기는 구조물로 이용 되거나 

미혹 된 온갖 행동을 합리화 하는 데에 쓰이기 쉽다.


 

영적 세계에서는 이런 경우가 허다하다. 

에고가 혼자서 이렇게 속삭이는 것을 흔히 볼 수 있다. 

‘휴, 난 이제 깨어났어. 난 마침내 모든 현상이 절로 일어나는 것을 보았어. 

그러니 이제 나는 일어나는 어떤 일에도 책임이 없어. 

이 말이 마음에 안 든다면, 유감이지만 할 수 없지. 

그대가 실재의 궁극적인 본질을 깨닫지 못한 것일 뿐이니까.’ 

이 것은 우월감에서 나오는 에고의 환상 중 하나다. 

 

이미 말한 대로 이것은 매우 흔한 환상이다. 

그래서 나는 잠시 스쳐가는 깨어남으로부터 머무는 깨어남으로 가는 여정에서 

가장 큰 지원군은 바로 깊고도 철저한 진실함임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진실함만 있다면 우리는 이 우월감이 자만심의 한 형태라는 사실과, 

마음이 잠시의 통찰을 방패삼아 그 뒤에 숨으려 한다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다.


 

영적 교사의 입장에서, 이 것을 사람들에게 깨닫게 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이 독특한 형태의 망상은 아주 잘 방어 된 에고 구조 안에 있다. 

그 것은 꿰뚫기가 아주 힘들다.

 

가끔 겪게 되지만, 꿰뚫기가 가장 힘든 에고는 

바로 실재를 잠깐이라도 보았던 에고이다. 

흔히들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누군가가 실재를 잠깐이라도 정말로 보았다면, 

그게 아무리 짧은 순간이라 하더라도 그 사람의 에고는 더 이상은 

그토록 방어적으로 되살아나진 않을 거라고 말이다. 하지만 그렇지가 않다. 

어떤 사람들은 깨어남의 경험을 하고 나서도 깊숙이 미혹 되어 있다.


 

사람들을 가르치는 동안 지금 껏 보아 온 바로는, 

이렇게 노골적인 우월감 속에 사는 사람들은 

다른 사람이 자신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는지, 

또 자신이 아는 그대로를 다른 이들도 알고 있는지를 확인하고자 애쓴다. 

 

그들은 남들이 자기 말에 동의하는지, 

아니 그 보다 더 먼저, 자신이 깨달았다는 걸 남들이 알고 있는지를 확인하려 든다. 

그들은 심지어 내가 가르치고 있는 단상 위로 뛰어 올라와 

마이크를 움켜잡고는, 청중을 향해 자기 식의 진리를 설하기 시작한다. 

 

그 때마다 나는 이런 사람들은 도저히 뚫고 들어가서 

만날 수 없을 것 같은 느낌을 갖게 된다. 하지만 세월이 충분히 지나면,

그때는 삶이 그들을 꿰뚫고 들어갈 것이다. 삶에 멋진 점이 있다면, 

우리가 진실이 아닌 차원에서 행동할 때 

삶은 결국 우리 편을 들어주지 않는다는 점이다. 

어느 시점에선가 그 삶은 무너져 내릴 것이다. 

어떤 식으로든 우리는 스스로 무릎을 꿇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우리는 결국 자기 자신을 직면하게 된다. 

영원히 미혹에 빠져 살게 되는 일 따위는 없다. 

삶은 그런 식으로 작동하지 않는 것이다.

 

우리는 모두 자신이 어떤 자만심이나 우월감, 깨어나지 못한 자들을 

콧등 아래로 내려다보는 기분을 느끼지는 않는지를 잘 살펴야 한다. 

만약 어떤 우월감을 느낀다면 분명히 알아야 한다. 

즉 이것은 진정한 깨어남의 관점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것은 바로 깨어남의 경험을 움켜잡고서 

깨어난 척하고 있는 에고의 관점이다.

중요한 또 한 가지가 있다.  깨어남 이후에 

어느 정도의 우월감은 정상적이라는 것이다. 

 

선가禪家에 “공空에 취한다drunken on emptiness”는 말이 있다. 이 말은, 

깨어남 자체에 내재 된 에너지와 아름다움에 잠시 도취 되는 것을 뜻한다. 

그런데 만일, 깨어나는 순간 에고의 구조가 정말 용해 되었다면, 

도취 될 어떤 에고도 없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대개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대부분의 경우, 

남아 있는 에고 구조의 어떤 부분이 깨어남을 실현한 것을 두고 한껏 도취 되게 마련이다. 

다시 말하지만 이 것이 나쁘다는 것이 아니다. 내 말은 단지, 

노골적으로든 교묘하게든 간에 이런 현상이 일어나게 된다는 것이다.

 

만약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을 보게 되거든, 그 것을 있는 그대로 인식하라. 

여러분이 그 때문에 무서워한다고 해서 그 현상이 사라지지도 않을 것이며,

그 것을 믿고 그 것을 따라한다 해도 역시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그 현상을 있는 그대로 보아 넘기도록 하라. 

많은 사람들이 겪게 되는 깨어나는 과정의 일부로서 말이다.

만약 여러분이 진실한 자리에 머물러 있다면, 

그 어떤 우월감도 참된 것이 아님을 알게 된다. 

 

이렇게 되면 여러분은 자기가 스스로에게 무슨 말을 속삭이고 있는지를 알게 될 것이다. 

우월감을 느끼게끔 만드는 자신의 마음이 무슨 말을 하는지를 알게 될 것이다. 

마음만이 우리를 미혹시키는 유일한 자이기 때문이다. 

 

모든 망상은 마음에서 시작 된다. 모든 망상은 우리가 스스로에게 속삭이고, 

또 자기가 하는 그 말을 참이라고 믿는 온갖 방식들에 뿌리를 두고 있다.

모든 망상을 풀어헤쳐 우리를 분리시켜 놓는 

모든 것을 꿰뚫어 보게하는 열쇠는, 그 것의 기원을 밝혀내는 것이다. 

 

여러분은 스스로에게 무슨 말을 속삭임으로써 분리의 느낌을 만들어 내고 있는가? 

그 것이 우월감이든, 아니면 무엇이든 간에 말이다.

한 여인에게 돌을 던지려는 무리를 만났을 때 예수는 이렇게 말했다. 

“죄 없는 자가 먼저 돌을 던져라.”

여기서 예수는 나뉨 없는 경지로부터 말하고 있다. 

그는 자기 자신을 돌 맞는 여인 보다 더 나은 존재로 보지 않았다. 

이 여인이 무슨 죄악을 저질렀든 그것은 상관이 없었다. 

그의 말은, 어느 누구도 죄 짓지 않은 자는 없다는 것이다.  

여기서 죄란 좌표를 잃고 빗나간 것을 일컫는다. 

 

어느 누구도 그릇 된 견해를 피해 가지 못한다. 

누구나, ‘그렇게 하지 않았더라면 좋았을 걸,’ 하는 짓을 저지른 적이 있다. 

우리 모두가, 깨달음과는 거리가 먼 방식으로 행동한 적이 있다. 

우리 중에 어느 누구도 나머지 사람들과 하등 다를 것이 없다. 바로 이런 이유로 해서, 

나뉨 없는 관점으로부터 행동하게 될 때는 모든 우월감이 사라진다.

 

만약 여러분이 자신에게서 어떤 우월감을 알아차리게 된다면, 

그 때 가장 중요한 것은 그 것을 믿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 느낌을 쫓아내라는 것이 아니라, 그 것을 믿지 말라는 것이다.  

그 것을 믿지도 않고, 또한 자신으로부터 쫓아내버리지도 않는 차원에서 

대응하면, 그때 용해 현상이 일어난다. 만약 그 것을 쫓아내려고 하면,

 ‘저항하면 더욱 끈질기게 달라 붙는다’는 법칙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여러분이 무엇을 쫓아내 버리려 할 때마다 실제로 여러분은 그것에 힘을 보태 주고 있는 것이다.

 

-깨어남에서 깨달음까지~

 

 

수행자의 마지막 에고인 영적인 에고는  

저 역시도 미해결의 난제 입니다 ^^    작성자 : 나무

 

 

 [출처] (북 카페 정신세계)

 ]  http://cafe.naver.com/mindbook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