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 백악관 정책 차관보 강영우 박사의 아내 석은옥씨의 고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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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영우 박사의 아내 석은옥씨의 고백
한국 최초 시각장애인 박사이자,
미 백악관 국가 장애위원회 정책 차관보, 강영우 박사.
그의 뒤에는 한평생 그의 지팡이가 되어 준
아내 석은옥씨의 헌신적인 사랑이 있있었다.
석은옥씨가 직접 말하는 감동 인생.
남편의 성공을 위해 헌신해온 감동 인생 사연”
가만히 눈을 감으면
나의 인생을 뒤바꾼 한 맹인 소년과의 만남!
누나로 6년, 약혼녀로 3년,
그리고 아내로 34년을 그의 그림자가 되어 살아왔다.
하지만 그 찬사 뒤에는 우리 부부의 눈물과 고통
그리고 처절한 노력이 있었다.
우리의 만남은 어쩌면 숙명적이었다.
그가 평생 단 한 번 걸스카우트를 방문한 그때,
나는 걸스카우트 신입회원으로
저 불쌍하고 초라해 보이는 맹인 중학생이
10년 후 나의 신랑이 된다는 사실을 미리 알려주셨다면
나는 그대로 도망쳤을 것이다.
가난과 실명의 고통에 찌든 모습을 상상했는데
문을 열고 들어서는 학생은 외모만 봐서는 전혀 맹인 같지 않았다.
누군가 그를 버스정류장까지 데려다주고 오라고 했을 때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나왔는지 “내가 다녀오겠다”며
허락이 떨어지기도 전에 그 학생의 손을 덥석 잡고
광화문 사거리로 나섰다.
그 순간부터 나는 그의 지팡이가 되어 오늘에 이르렀다.
열다섯 살 때 축구를 하다가 공에 눈이 맞아 실명했다.
뇌일혈로 세상을 뜨자 고아가 된 형제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그는 장애인 재활원!으로,
자살도 여러 차례 기도했다.
그러나 어느 목사님의 도움을 받은 뒤
“갖지 못한 한 가지를 불평하기보다 가진 열 가지를
감사하자”며 마음을 고쳐먹었다고 한다.
남편은 어렴풋이나마 내 젊은 날의 모습을
그때부터 주말이면 맹학교 기숙사에 찾아가
책도 읽어주고 안내도 해주는 일을 1년 정도
봉사하다 보니 정이 들어,
그를 동생으로 삼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잘됐다 싶어 그 생각을 실천에 옮겼다.
당시 나는 그가 투병과 방황으로
여러 해 학교에 다니지 못했다는 것을 몰랐다.
그저 대학생과 중학생이라는 것만 생각해
부담 없이 그의 누나가 되겠다고 했을지도 모른다.
한 살 반밖에 차이가 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지만,그때는 그것이 문제가 되지 않았다.
학교에서 소풍을 갈 때면
빨래,장보기부터 대학 진학 준비에 이르기까지
온갖 뒷바라지를 해야 했지만,
동생을 도와준다는 것 자체가 내게 기쁨이었다.
우리는 너무나 아름다운 사랑을 했다.
물론 아가페사랑이다.
당시엔 맹인에 대한 편견이 심했다.
맹인이 버스를 타려고 하면 차장이 밀어내기 일쑤고,
가게에서는 재수가 없다며 오후에 오라 하고,
식당에서는 구석 자리에 앉으라고 했다.
그동안 혼자만 생각해온
나와 헤어지는 것이 싫었는지,
그는 생각해보지도 않고 안 된다며 반대했다.
나는 좀 당혹스러웠지만, 차분히 그를 설득했다.
천직으로 알고 계속할 텐데
더 늦기 전에 유학을 다녀와야겠다는 말에
결국 그도 동의했다.
그동안 정이 든 그와의 이별은 큰 아픔이었다.
게다가 처음으로 가보는 세계에 대한
그때까지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던 누나를 보내고
혼자 힘으로 다가오는 대입을 준비해야 하는
부담과 불안이 겹쳐, 이별의 고통은 가중 되었다.
대학 입시에 전념했다.
그리고 1968년
연세대 문과대 교육학과에 입학 원서를 제출했다.
맹인이라는 이유로 입학원서 자체를 접수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입학원서조차 낼 수 없다니,
그를 위해 아무것도 할 수 없어 발만 동동 굴렀다.
그런데 4주 정도 지나 또 한 장의 편지를 받았다.
영문과 교수 한 분이 대필 해 주어
입학시험을 무사히 치르고
그는 1968년 3월, 서울맹학교 고등부에서
연세대에 입학해 그동안 박박 깎은 머리를 기른 채
교복 대신 신사복을 입고 찍은 사진도 보내주었다.
나는 15개월 만에 귀국했다.
더 이상 누나 동생이 아닌, 사랑하는 사람으로
학기말 시험을 마치고 함께 연세대 백양로를 걷던 중
영우가 내게 사랑을 고백했다.
맹인 동생을 이해해달라고 할 필요도 없으니
잘됐다고 생각했다.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은 채-
장래를 약속한 우리 두 사람은 너무나 행복했다.
우리 두 사람은 비밀리에 약혼식을 올렸다.
무남독녀 외동딸을 둔 홀어머니가 애지중지 기른 딸을
맹인에게 준다는 것은 청천벽력과 같은 소식이었을 것이다.
어머니는 “절대로 안 된다!”며 반대하셨지만
결국 딸의 고집을 꺾지 못했다.
어떤 친구는 다시 한 번 내 얼굴을 쳐다보며
“관상을 보면 팔자가 그렇게 센 것 같지는 않은데
하느님이 해도 너무하셨다.
아무리 공부를 잘하고 학벌이 좋으면 뭐하니?
너는 좋아서 결혼한다 해도 그 사이에서 태어나는
자식들을 생각해봐. 아버지가 장님인데” 하고 말렸다.
대학생이던 약혼자를 졸업하기까지
만 3년이나 기다린 끝에 드디어 나이 서른이 다 되어
모두 판사, 의사, 약사, 대기업 간부의 부인이 되어 있을 때
연하인 맹인 학사를 신랑으로 맞은 것이다.
그래도 어찌나 행복하고 감격스러웠는지,
얼굴에서 미소가 떠나지 않아
L.A.로 가는 비행기에 올랐다.
당시에는 장애가 해외 유학의 결격사유에 속했다.
그 항목을 삭제하고
한국 장애인 최초 정규 유학생이 될 때까지
겪은 마음고생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다.
피츠버그대학교 9월 학기 개강을 일주일 정도 앞두고
한미재단총재와 연세대 총장이 공동으로 제안한
청원서에 문교부장관이 서명함으로써 미국 유학의
가장 큰 장벽을 무너뜨릴 수 있었다.
지원해주신 양부모님을 만나 일주일을 보내고
피츠버그에는 개강 전날 도착했다.
서울을 떠나기 직전까지
그러나 그를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면서 돕지 않으면
강의실에도 갈 수 없어 편하게 쉴 수도 없었다.
남편을 강의실에 들여보낸 뒤 도서관에서
책을 녹음하다 깜빡 잠이 들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이미 강의가 끝난 지
30분 이상 지난 시간이었다.
그는 불안한 모습으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여보!” 하고 부르자 안도의 한숨을 내쉬면서도
어디 갔다가 이제 왔느냐며 화를 버럭 냈다.
나는 미안하기도 했지만,
항상 잘하다가 한 번 실수했는데
그것도 이해하지 못하나 싶어 섭섭한 마음에
말다툼을 하게 되었다.
그것이 미국에 와서 처음 한 부부싸움이었다.
아기가 태어나면 혼자 강의를 받으러 다녀야 하는데
엄두를 못 내고 미루던 차에
하지만 아무리 보행훈련을 받아도
그러니까 보행훈련을 받아, 나에 대한 의존도가
다소 줄어들 기는 했지만,
여전히 나는 그를 안내해 주어야 했다.
남편의 대학원 강의실을 향해 떠날 때,
아이들이 안쓰럽기도 했지만, 남편의 강의가 먼저였다.
맹인 아빠에게 젖먹이 아기를 맡기고
그의 눈이 되고 지팡이가 되는것이 먼저였다.
몸이 아플 겨를도 없이 매일 동분서주하는
수업료는 문제가 없었는데,
생활비로 나오던 장학금이 만료된 것이다.
닥치는 대로 막일이라도 해서
생활비를 벌어야 했기에 일자리를 찾아 나섰다.
병원 청소원으로 겨우 취업이 되었는데
이민국에서 노동 허가가 나지 않았다.
캠퍼스 근처 공원에서 그네를 타는
한 맹인 여성을 우연히 보게 되었다.
남편과 함께 다가가
우리 사정을 이해할 것 같아서
초면에 우리 형편을 털어놓았다.
와서 함께 지내자고 했다.
대신 식사 후 설거지를 해주고, 두 내외가 외출할 때
가족의 생계가 해결될 수 있을 것 같아,
생각할 것도 없이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 집에 살면서 매일 설거지하고
아이들을 돌봐주는 일을 해도 행복하기만 했다.
남의 집에서 식모살이한다고 생각하지 않고
머지않아 박사가 될 남편을 내조한다고 생각했으며,
그러한 기회를 주신 하느님께 감사했기 때문이다.
객관적으로 볼 때 남의 식모살이나 하는 처지가
행복해 보이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때가
아주 좋은 친구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미국 문화를 배우는 계기도 되었다.
또 두 살 된 진석이도 네 살, 다섯 살이던
그 집 아이들과 친구가 되어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다.
그때 둘째 아이 진영이가 생겨 더욱 감사한
마음이었을 것이다.
생각해본 적이 한 번도 없다.
우리 내외는 출세지향적이 아닌,
성취지향적 가치관을 가지고 있어
맹인이기 때문에 넘어야 할 물리적, 심리적, 법적,
제도적 장벽을 넘을 때마다 오히려 성취감을 느꼈다.
어려움을 극복할 때마다 승리감과 보람을 느끼며
감사할 수 있었다.
남편이 드디어 피츠버그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대학 당국의 배려로 박사복을 입은 남편을
총장 앞으로 안내하면서 느낀 보람과 행복이란….
“마음껏 사랑하고 즐긴 것은 결코 잊히지 않으며,
자신의 일부분으로 남게 된다”는 헬렌 켈러의
말이 생각났다.
어려운 내조를 하면서
보람을 느낄 수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의 지팡이가 되어,
때로는 희생을 요하는 힘겨운 내조를 할 때도
그 일을 사랑하고 즐길 수 있었다.
그의 성공을 나의 성공으로 느낄 수 있었을 것이다.
나는 비록 학사복을 입었지만,
남편이 받은 박사 학위가 나 자신의 성취인 것처럼
느껴져 더 행복했다.
그렇게도 고대하던 박사학위를 받고도
남편은 고국에 돌아가 대학 강단에 설
기회를 얻지 못해 무직자로 8개월을 보내기도 했다.
논문지도를 할 수 있겠느냐며,
어디에서도 남편을 채용하지 않았다.
무직자인 박사 남편,
이렇게 네 식구가 당장 길거리에 나앉을 형편이었다.
장학금으로 지급되던 생활비가 졸업과 동시에
끊긴 것이다.
하지만 나는 절망하지 않았다.
남편이 포스트 닥터럴 프로그램에 들어갈 때의 일이다.
오도가도 못하고 막다른 골목에 배수진을 친 남편의 고통을
너무나 잘 알기에 나는 오히려 담대하게 말할 수 있었다.
여기까지 인도하신 하느님께서는 반드시 현재의 고난을
성공의 조건으로 바꿔주실 테니 인내하며 좀더 기다려봐요.
부디 아무 걱정 말고 연구에 몰두하고 직장 찾는 노력이나
계속하세요.”
그러한 위로와 격려의 말을 해줄 때가
하루는 나의 격려가 통했는지
기적이었다.
번번이 영주권이 없어 채용되지 못했는데,
이번에는 일단 학생비자로 취직이 된 것이다.
남편은 인디애나 주정부 교육부에 근무하게 되었다.
1월 3일 첫 출근을 하게 되어 서둘러 인디애나로
이사를 가야 했다.
그리고 벌써 30년이 흘렀다.
무엇보다 감사한 것은,그동안 무사고 운전으로
남편은 인디애나 주정부 교육청에 근무하면서,
저녁에는 노스이스턴 일리노이대 대학원에
출강하기도 했다.그뿐만이 아니다.
로터리 클럽 회원으로
그때마다 나는 운전사 역할을 해야만 했다.
어쩌다 병이라도 나서 내가 누워버리면
일상생활의 리듬이 깨질 텐데,
다행히도 그런 기억은 없다.
느끼는 보람이 엔도르핀을 나오게 하지 않았나 싶다.
2년 가까이 되던 1987년 9월,유학을 떠난 지 6년 만에
한국 최초 맹인 박사 금의환향’ 등의 제목으로
남편의 귀국을 대서특필했다.
그때 그 기사를 본 연세대 윤형섭 교수가
조선일보에 '평균점수’라는 제하의 칼럼을 썼다.
내용인즉슨, 앞 못 보는 장님이 박사가 되었다기에
석사학위 교사까지 된 부인의 희생적인 사랑과
내조가 있었음을 알게 되었으며,
이는 한국 여성의 평균 점수를 올려주었다는 것이다.
1983년 6월 5일은
캐나다 토론토에서 열린 국제 로터리 세계대회에서
그가 연설을 한 것이다.
1만6000명의 세계 민간 지도자가 모인 단상으로
남편을 안내하는데, 연설자도 아닌 내가
그다지 긴장하지 않고 연설했다.
그리고 남편은 열광적인 기립박수를 받았다.
미국 연방정부 공무원은 450만 명에 달한다.
그중 2500명이 대통령의 임명을 받으며,
그중 500명은 상원 인준까지 받아이름 앞에
'honorable’이 붙는다.
남편은 ‘honorable’이라는 경칭이 붙는 연방정부
최고 공직자가 되었다.
대통령 직속 국가 장애위원회 정책 차관보 자리에
오른 것이다.
그를 안내할 때 느낀 감회는 지금도 잊지 못한다.
이젠 명예로운 자리에 서게 되는 자랑스러운 남편을
안내하면서 느끼는 감회를 어떻게 말로 표현할 수 있을까?
이렇게 우리 부부는 서로의 강점으로 약점을 보완하는
하나의 팀으로서 아메리칸 드림을 이루게 되었다.
진석이는 링컨 대통령의 장남 로버트 토드와
필립스 엑서터 아카데미, 하버드대 동문이 되었다.
그리고, 안과의사의 꿈을 이루어
산부인과 의사인 아내를 맞았다.
작은아들 진영이는 필립스 앤도버 아카데미 출신으로
부시 대통령 부자와 동문이다.
약관 27세의 나이로 연방 상원 법사위원회에서
리처드 더빈 상원의원 입법 활동을 보좌하는
아내 역시 하버드 법대를 졸업하고 변호사로 활동 중이다.
교육자의 꿈을 이루었을 뿐만 아니라,
미국교육인명사전, 미국여성명사인명사전에 올라
역사 속에 작은 흔적을 남기게 되었다.
내 생일에 아들 며느리가 한자리에 모였다.
케이크를 앞에 두고 축하 노래를 부르려는 순간
남편이 말했다.
“아들, 며느리 네 명의 박사가
“네 명이 아니라 다섯 명이잖아요.”
그렇다. 한집에 다섯 명의 박사가 있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 그의 지팡이가 되어 헌신적인 아내로,
두 아들을 잘 키워 훌륭한 며느리들까지 본
어머니로 살아온 나 자신이 자랑스러웠다.
이처럼 선명한 비전으로 내 인생을 인도해
신앙 안에서 명문가를 만드는 동반자가 되어 준
남편에게 경의를 표하고 싶다.

분명 줄수 있음에도
(평강 공주가 온달을 장군 되게 하듯이)
언제 바람처럼 떠나가 한줌 흙으로
스러질지도 모르는 몸통이 건만
아까워하며, 정신을 세류에 촛점을 맞춰서
휩쓸려 딴청 부리며 가느라
오직 한 마음만을.... 주는 거 거부하고
좁은맘도 모른채... 어디쓰려고 아끼느랴
단 하나인 부부가 참사랑 되기를 힘들어하고
외면으로 일관하다가,,,,
생의 마지막 날 가져갈 사랑하나도 건지지 못한채로
떠나가려는 걸까 ...왜 그래야만 했던 걸까?
왜 자기 집에서 사랑을 두고도
사랑을 구현하지 못하고
각각 딴청 피다가
가정은 사랑의 부재로 공허한 바람만 불게하는지...ㅠㅠㅠ
부인에게 남편에게 한결같다면 베푼만큼....
공짜가 없거늘 다른 여자 10명 와도
지금 자기 꼴 안바뀌는데 누구랑 살아도
다 똑같은 거 뻔한 거 안다고 말은 하면서도
자기 부인, 자기 남편 하나만 못하건만
어깃장을 부려 파국을 자초하는 걸가....
삶 자체가 역경을 헤쳐가게 되어 있는 구조 이건만
정신 똑바로 차려서, 욕망 억제하고 좋은씨앗 스스로 길러서
다음 세계로 건너갈 준비로 부끄럽지 아니한 사랑 하나 가지고 떠나야
방황을 그쳐서,,, 후손까지 든든해 하고
생사를 해탈한 선물 주고 떠나야하지 않을까 ㅜㅜ
Una Furtiva Lagrima-Izzy
(남 몰래 흐르는 눈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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