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뭇 생명을 어머니같이
뭇 생명들을 도와야 할 타당한 이유가 있다. 비록 지금 현재
는 자신과 관계없는 듯 여겨지는 사람들 일지라도, 사실상 그들
과 자신 사이에는 매우 친밀한 끈으로 매듭져 있다. 그래서 그
들 모두를 도울 의무가 있는 것이다. 그 끈은 서로서로를 어머
니와 자식의 처지로 복잡하게 얽어매고 있다. 현재의 나는 결코
우연히 빚어진 존재가 아니다. 수없는 지난 생(生)의 산물(産
物)이다. 시작없는 옛적부터 네 가지 방법 - 자궁을 빌어서, 알
에서, 습기에서, 그리고 하늘 나라에 탄생할 때 처럼 갑자기 나
타나는 식으로 - 으로 수 많은 생을 되풀이 해왔다. 이 중에서
자궁을 빌거나 알에서 태어날 땐 반드시 어머니가 필요하다. 이
두 가지 방법으로 태어난 햇수가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을 것이
므로 자신이 만났던 어머니도 그 수를 모를 정도일 것이다. 곰
곰이 생각해 보라. 세상에 한 번쯤 내 어머니 되지 않았던 생명
이 누구겠는가?
물론 이러한 논리가 설득력 있기는 매우 어렵다. 윤회의 참
모습과 자기 자신이 지난 세상에 수많은 생을 겪었다는 확신이
없기 때문이다. 단순히 설명만 갖고서 확신을 심어 주기란 애당
초 불가능하다. 바르고 합리적인 명상을 깊이 하면, 확신은 지
적인 이해를 통해서가 아니라 실제적인 직관(直觀)으로 닥친다.
그러나 그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그런 까닭에 거의 모든 사
람들은, '삶은 다만 이 목숨 붙어 있을 때까지이며 윤회따위는
절대로 없다' 라는 그릇된 견해를 고집한다. 여기에 대해서 더
확고한 신념을 가지려면 의식의 본성(本性)과 존재방식, 말하자
면 의식(consciousness)이 무엇을 근거로 하여 일어나는가를 잘
알아야 한다. 그렇게 하지 못하면 여전히 많은 의혹이 남을 것
이다. 예리한 관찰을 통하여, 마음과 마음의 작용을 구성하고
있는 요소는 단지, 갖가지 상이(相異)하고 거칠거칠한 생각들에
불과함을 알아차리기 어렵지 않다. 아무튼 일단 자신이 과거에
도 무수(無數)한 생을 겪었다는 확신만 서면, 뭇생명을 자기자
신의 어머니로 여기려는 명상은 큰 힘을 얻는다.
이 생에서의 자기 어머니를 어머니로 인정하는 데에는 아무런
반성이 필요없다. 이와 비슷하게 뭇생명들을 아무 망설임 없이
자신의 어머니를 대할 수 있다면, 이 단계의 명상은 성취된 것
이다. 자신의 어머니든, 한 마리의 짐승이든 똑 같은 사랑으로
맞이할 수 있을 때까지 마음 훈련을 멈추지 말아야 한다. 지금
은 자신이 인간의 아들이지만, 과거 어느 세상에서는 한 마리의
강아지였을런지 모른다. 겉 모습은 달라도 '어머니였고 아들이
었다'는 점에 있어서는 두 관계가 동일 한 것이다. 자신과 뭇생
명 사이의 이러한 맥락(脈絡)을 인정하는 마음 훈련이 곧 모든
생명을 자신의 어머니로 여기는 수행이다. 이 단계와 마음의 평
정을 구하는 명상 사이에는 질적으로 커다란 차이가 있다. 후자
는 마음의 평화를 추구하는 반면에 이 단계는 뭇생명에 대한 동
족의식(同族意識)과 평등한 감정을 기른다. 갓 떠오르는 태양은
평원(平原)을 두루 비추지만 그다지 만물에 따스함을 주지 않는
다. 태양이 점점 높이 솟아 오를수록 평원의 열기로 더해간다.
이 단계의 명상이 일출(日出)이라면, 다음 단계는 태양이 중천
(中天)에 떠오르면서 점점 강한 열기를 발산하는 모습이다.
3) 그 은혜를 생각함
뭇 생명들을 자신의 어머니같이 여길 뿐 아니라, 그 은혜를
항상 잊지 말아야 한다. 자신을 향한 어머니의 은혜를 잊지 아
니 할 때 어머니를 사랑하는 마음이 깊어지는 법이다. 세상에
태어나기 전 나는 어머니의 자궁안에서 보호받으며 귀하게 자라
고 있었다. 온전한 기쁨과 부족함 없는 배려가 나를 에워싸고
있었다. 그 속에서 나는 어머니의 육체적 집이었고, 어머니의
행동의 자유까지 구속했다. 식사를 할 때나, 길을 걸을 때나,
어머니의 관심은 오로지 나의 안위(安危)와 건강에서 떠나지 않
았다. 어머니는 기꺼이 즐거운 마음으로 그렇게 하셨다. 출생시
(出生時)에는 어머니를 얼마나 고통스럽게 해드렸던가? 내가 세
상으로 나오자 어머니는 방금까지의 고통을 금새 잊어 버리고,
마치 귀중한 보배를 얻기나 한듯이 나를 안아들며 기뻐하셨다.
그때 아직 나는 몸을 다스릴 줄 몰랐으므로 연신 젖을 토하거나
악을 쓰며 울어댔다. 그래도 어머니는 조금도 귀찮아 하지 않고
자상하게 나를 달래셨다. 사랑이 철철 넘치는 눈길로 나는 내려
다 보며 내 이름을 불러 주신다. 아무런 댓가도 바라지 않고,
어머니는 무한한 사랑을 쏟으셨다. 어머니의 그같은 사랑이 없
었던들 어떻게 오늘날의 내가 존재할 수 있었을까?
자식을 보살피는 것은 모든 어머니들의 의무라고 당연시 할
수도 있다. 거기에다 자식을 양육하는 것은 어머니 자신의 기쁨
도 되지 않는가? 그러나 지금의 나를 있도록 해 주신 어머니의
한결같은 행위는 무슨 댓가를 바란다던가 누가 시켰기 때문에
할 수 없이 지어진 게 아니다. 분명히 모든 여인은 선택의 자유
가 있고, 어머니는 자식을 낳아 기르기를 선택하신 분이다. 어
머니라도 가끔은 이기적인 태도를 보일 때가 있다. 그러나 자신
의 이익과 자기 자식의 이익 중 하나를 택해야 하는 문제에 부
딛칠 경우, 서슴없이 자신의 이익과 행복을 희생시키기 마련이
다.
자식을 향한 어머니의 댓가 없는 사랑과 보살핌이 비단 인간
사이에만 존재하는 건 아니다. 동물들에게서도 이같은 모습을
예사로 관찰할 수 있다.
아직 제 몸을 가누지 못하는 둥지에 뜻 밖의 적이 침입하면,
어미새는 목숨을 걸고 아기새를 지킨다. 어머새 자신도 뾰족한
부리 외에는 아무런 무기가 없기 때문에 잘못하여 목숨을 잃기
도 한다.
과거 세상의 특별한 카르마로 말미암아 자식을 학대하는 어머
니도 지극히 예외적으로 있기는 하다. 그러나 모든 어머니들의
자식을 대하는 태도는 - 그 표현 방법이 어떠하건 - 사랑의 일
종이다. 아무튼 스스로의 마음을 계발하려고 결심한 이상 늘 문
제를 긍정적으로 생각함이 마땅하다. 항상 긍정적인 삶을 살아
야 자신의 마음이 남을 이익되게 하려는 쪽으로 바뀌어 간다.
부정적인 태도의 삶은 얻을 것이 없다. 그리고 자신에게 손해를
끼친 사람 - 비록 그가 나의 부모가 아니고 나의 자식이 아니더
라도 - 에 대한 앙심을 먹는 것은 삿되다. 모든 물리적, 정신적
괴로움은 하나 같이 자신의 카르마가 맺은 열매인 까닭이다. 고
통을 주는 특정한 사람들은 나의 열매를 날라다 주는 도구에 불
과하다. 남들이 자신에게 베푸는 사랑은 자신에게 끼치는 해
(害)보다 훨씬 감미롭지 않은가?
윤회의 소용돌이 속에서 우리는 수많은 생(生)을 겪었다. 삶
의 괴로움을 벗기 위하여 또, 행복을 얻을 목적으로 언제나 '무
수한 남들'에게 의지해 왔다. 혼자만으로는 결코 그 일을 이룰
수 없었기 때문이다. 자기자신의 힘으로 윤회에서 벗어나는 그
순간까지는 잠시라는 남들의 도움에 의지하지 않는, 상호의존적
인 생활을 그만 둘 도리가 없는 것이다.
자신이 아주 고상하지도 않고 너무 천하지도 않은 인간 세계
에 태어날 수 있었던 것도 알고 보면 모든 생명들의 도움 덕분
이다. 과거 세상에서부터 인연을 맺어 온 훌륭한 벗들의 우정과
도움은 자신이 깨달음에로의 여행을 끝마칠 때까지 계속 이어진
다. 일상생활에 꼭 필요한 식품, 의류, 돈 등만 하더라도 그것
들이 우리의 손에 들어오기 까지는 수많은 사람들의 노고가 부
가 되었다. 물론 필수품, 사치품을 생산하는 사람들은 그들대로
스스로의 목적 아래에서 그렇게 했겠지만, 그들의 노력 결과가
어쨋든 나를 이롭게 한 건 사실이다. 행복을 추구하는 인간의
욕망은 끝이 없다. 인간은 편안하고 자신을 즐겁게 해 주는 것
을 좋아하며, 자신을 괴롭히는 것을 꺼린다. 직접적이건 간접적
이건 인간은 명예와 칭찬을 바란다. 이렇게 바라마지 않는 편안
함, 기쁨, 칭찬을 가까운 이가 아니라면 누가 자신에게 듬뿍 주
겠는가? 가까운 이와 좋은 친구의 도움 덕분에 윤회속이나마
우리의 삶이 제대로 굴러가는 셈이다. 그보다도 만일 그들이 없
다면, 정신적인 발전이 도무지 불가능하다. 대상삼을 뭇생명들
없이 어떻게 보살의 여섯 가지 실천덕목(六波羅蜜)이 있을 수가
있을까? 붓다가 되려면, 우리가 따라야 할 가르침을 베푸시는
붓다의 자비와 아울러 모든 생명들의 도움도 반드시 필요하다.
보리행경에서 산티데바(Santideva)보살이 이 점을 지적했다.
"자신이 붓다의 깨달음을 얻고자 하여 붓다들과
모든 생명들의 덕을 입을진대
붓다께서는 예배와 공양을 드리면서
뭇생명들을 가볍게 여기나니
이 무슨 터무니 없는 일인가?"
붓다와 뭇생명들에 대한 감사하는 마음을 습관화시켜야 한다.
한 가난한 농부에게 어떤 사람은 한 자루의 곡식 씨앗을 주고,
또 한 사람은 밭뙤기를 주었다. 농부는 누구에게 더 고마움을
느낄까? 아마 두 사람을 똑같이 은인으로 여길 것이다. 바로 붓
다는 나에게 다르마의 씨앗을 주셨다. 그리고 모든 생명들은 그
씨앗을 심고 가꾸어야 할 밭이다.
4) 그 은혜에 보답하기
이상에서 자신이 뭇 생명들에게 여러가지로 빚지고 있음을 알
았다. 그렇다면 이제 그것을 빨리 갚을 길을 찾아야 한다. 모든
생명들은 하나같이 고통에서 벗어나 행복을 얻기 바라고 있다.
그러므로 가장 올바른 빚 갚음은 그들의 괴로움을 바로 알고 그
들에게서 괴로움을 제거해 주려는 노력이다. 우리의 다르마 수
행자는 대개 작은 구멍을 통하여 비치는 한 줄기 광선에 불과하
다. 그러나 보살(Boddhisattva)의 수행은 태양 빛의 홍수다. 자
신의 마음을 보살의 커다란 의식으로 바꾸는 노력에 진력(盡力)
해야 한다.
"무한한 자비의 힘 갖게 하소서
어머니가 망나니 아들 사랑하듯
고뇌에 찬 뭇생명들을 어찌할꼬 어찌할꼬
그 생각 끊이지 않게 하소서
내 어머니께서 내게 하셨듯이"
5) 남과 나를 동등히 여김
어머니 같은 뭇생명들의 은혜에 보답할 결의(決意)를 굳힌 후
에는 새로운 마음 태도를 가져야 한다. 과연 그들을 어떻게 도
울까? 그들 자신이 원하지 않으면서도 갖고 있는 것 -괴로움-
을 제거해 주는 방법을 알아야 한다. 그들이 갈망하면서도 갖지
못한 것 -행복-을 선사해야 한다. 이러한 책임을 짊어질만한 강
한 힘을 찾아야 한다. 하나 하나의 생명을 꼭 그와 같이 해줄
수 있다는 자신감을 길러야 한다. 나 자신의 괴로움도 지천인
판에 남의 괴로움까지 떠받을 것 까지야? 하는 의구심이 생길
수 있다. 그래서 이 단계의 수행은 이러한 의구심을 깡그리 소
멸시키는데 목적을 둔다.
자신을 예로 삼아 볼 때, 이를테면 아주 작은 고통도 맞이하
기 싫다. 결국 모든 생명들도 마찬가지 심정이다. 경험으로 미
루어 보면, 아무리 커다란 만족도 자신의 더 행복하고픈 욕망을
잠재우지 못한다. 다른 생명들 역시 마찬가지다. 언제나 덜 채
워진 만족으로 하여 마음이 산란하다. 이렇듯 나도 남도 지극한
기쁨을 못 가지고 산다. 우리가 갖는 세속적인 기쁨은 늘 제한
이 많다. 행복을 초래하는 행위(skillful action)가 온전한 기
쁨을 줄텐데도, 그것들은 독(毒)인 양 피한다. 죽기보다 싫은
고통이 연신 닥친다. 감각적인 괴로움, 변화의 괴로움, 삶 그
자체의 괴로움, 거머리처럼 달라붙는 모든 고통들은, 개가 고깃
덩어리를 좇듯이 맹렬하게 추구해 온 괴로움을 초래하는 행위(u
nskillful deed)의 결과이다.
나를 비롯한 모든 생명들의 생각과 감정은 공유(共有)영역이
넓다. 너나 할 것 없이 괴로움을 초래하는 행위를 추구했으므로
육체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괴롭다. 우리는 모두 같은 틀(mo
ld)안에서 생산된 상(像)이다. 이와같이 모든 생명은 피차 같은
처지인 까닭에 유독 '나'를 별도로 고집함은 사리에 맞지 않다.
자기 자신의 행복을 위하여 필요한 요건들은 역시 모든 생명들
에게도 필요하다. 남을 대할 때 자기 자신과 다름없이 해야하는
훌륭한 이유가 여기서 생긴다. 만일 자기 자신의 괴로움을 제거
해야겠다고 절실히 느끼면서도, 다른 사람들의 고통은 무감각하
여 그들의 괴로움을 소멸시켜 주려는 생각이 시큰둥한 사람은
보리행경에 나오는 산티데바 보살의 충고를 들어야 한다.
"다리를 칼에 베었을 때, 손이 상처를 어루만지지 않던가? 다
리의 상처라고 손이 내버려 두는 일은 없다. 몸 전체가 괴로
움을 겪는 까닭에, 멀쩡한 손이 다리의 상처로 가는 것은 당
연하다."
이와 같이 남의 괴로움을 쓰다듬어 줄 책임을 느끼는 것은 자
연스럽다.
농부가 씨앗을 뿌리는 것은 곡물을 거둬 들이기 위해서지만,
줄기와 잎도 소중히 여긴다. 줄기와 잎은 부산물(副産物)에 불
과하나 그냥 내버려 두게 되면 수확이 성글기 때문이다. 마찬가
지로 바른 깨달음을 얻고자 하는 사람이 자신에게 직접 이익이
없다고 해서 줄기와 잎에 견줄 수 있는 모든 생명들에게 소홀히
함은 어리석다. 눈으로 당장 확인되는 사실이 아니기 때문에 의
심이 일어날 소지는 충분하다. 그렇다면 열렬히 호응해 마지않
는 노후생활에 대비한 저축은 그 이익이 당장 눈에 보이는가?
노후생활을 위한 저축은 그 이익이 즉시 확인되는 건 아니더라
도, 자신이 노력한 만큼의 결과가 맺어질 장래의 명확한 때가
상상되기 때문에 쉽게 정당화 되는 것이다. 노후 생활저축은 기
꺼이 시작하면서, 큰 깨달음을 맺을 기약 아래 남을 이롭게 하
기를 망설이는 사람이야말로 근시안(近視眼)이다. 뭇생명들을
향한 이로운 행위도 다음 생에 반드시 열매 -청년이 노인 되는
과정이 수없이 합쳐진 만큼의 시간이 흐른 뒤에- 를 맺는다.
여러 해 동안 꾸준히 이 단계의 명상을 되풀이 하면, 나와 남
이 동등하다는 자각(自覺)이 생긴다. 그 밖에도 다른 생명들을
도와야 하는 이유는 매우 많다. 이론적으로 만이 아니라 실제로
"나 자신과 남이 동등함을
깨닫게 하소서
오직 자기 자신만을 위해 노력함이
뭇생명을 구제하려는 일념인
붓다의 성스러운 행위와
어떻게 다른가 알게 하소서"
6) 이기심의 허물
뭇생명들 모두를 자기자신처럼 아껴야 한다고 입에 발린 소리
를 하면서도, 마음 속으로는 자기 사랑의 태도에 집착하는 게
예사다. 가령 개 한마리가 폭우 속에서 비를 흠뻑 맞고 서 있어
도 우리는 별반 걱정하지 않는다. 만일 자기자신이 그같은 처
지에 놓여 있다면, 당황하고 고통스러워서 어쩔 줄 몰랐을 것이
다. 대개는 스스로를 가장 귀하게 여기고 남은 덜 소중히 취급
하는데 익숙해 있다. 어느 때고 그런 느낌이 일어나면 당장 마
음을 바꿔 먹어야 한다. 소홀히 취급당하는 쪽이 상대방이 아니
고 자기자신이라면 어떨까 하고 생각하면서, 그렇다고 극단적으
로 자기 소홀의 태도를 택하라는 의미는 아니다. 자기 무시는
자신에게도 남에게도 도움이 안 된다.
붓다께서는 자기사랑의 태도를, 자기안에 많은 괴로움을 잉태
하고 있는 고질병과 같다고 하셨다. 자기 사랑은 깨달음을 방해
함과 아울러 자신의 발전을 가로 막는다. 항상 자기라는 작은
늪에 빠져 지내기 때문이다. 제일 저열한 지옥에서부터 가장 높
은 보살에 이르기까지 모든 생명들이 아직껏 붓다의 깨달음을
성취하지 못하고 있는 까닭도 모든 번뇌의 뿌리인 이 자기 사랑
의 태도를 끝내 버리지 못했기 때문이다. 두 마리의 벌레가 싸
우는 일, 두 나라 사이의 전쟁 등도 분명히 자기 사랑의 태도에
서 비롯된 나쁜 결과다. 그 순간에는 자신을 즐겁게 하겠지만,
자기 사랑은 보살의 수행을 가장 크게 방해한다. 자기 만족을
위하여 탐내고 욕심 부리며, 자신에게 불리한 상황을 회피하고
자 성을 내고 안간힘을 쓰는 동안, 괴로움을 초래하는 카르마는
차곡차곡 쌓여간다.
자기 자신을 가장 귀하다고 여기는 것은 가히 본능적 태도이
다. 이러한 생각을 모두 뒤엎어야 한다.
"자기 사랑이란 위대한 악마(惡魔)를
철저히 굴복시키게 하소서
그것은 심술궂은 괴물입니다
바라지 않는 고통의 원흉입니다
끈끈하게 달라붙는 고질병입니다"
7) 이타심(利他心)의 이익
이러한 태도는 매우 바람직한 것으로서 계발할 가치가 충분하
다. 우리의 짧은 세속적 행복과 마찬가지로 깨달은 분(覺者)들
의 완전한 자유 역시 뭇생명들의 이익을 위해 자신이 노력한 댓
가이다. 이 생에서 온전한 인간 몸을 받는 것은 지난 생에 폭
력, 살생, 해코지를 삼가한 덕택이다. 또 우리의 재산과 풍요한
생활은 과거에 즐겨 남에게 베풀고 인정(人情)을 쏟은 보답이
다. 붓다께서 깨달음을 성취하신 후 다르마의 수레바퀴를 굴리
신 까닭도 모든 생명들을 향한 무한한 자비심에서 였다. 모든
수행의 성취는 결국 남을 이익되게 하는 능력에 따라 좌우된다.
수행에 있어서는 첫 단계 건, 중간 단계건, 완성 단계건, 최고
로 중요한 것은 이타심(利他心)이다. 개, 닭, 쥐 같은 동물들
조차 자신에게 친절히 대하고 먹이를 주는 사람들에게는 정을
주지만, 쌀쌀맞게 대하는 사람들은 싫어한다. 자신의 친구나 친
척이 아니더라도 모든 사람들을 이롭게 하는 이는 세상에서 '고
상한 인품을 소유란 사람'으로 칭송받는다.
자신에게 유리한 사람에게 호의를 베풀기는 쉽다. 다르마에
문외한인 사람도 그렇게는 한다. 다만 혐오감을 풍기는 나쁜 성
품을 가진 사람들을 사랑하기가 참으로 어렵다. 군인들이 훈련
을 거듭하는 까닭은 전쟁이 일어날 것을 대비해서 이다. 훈련
안된 군인은 별 쓸모가 없다. 마찬가지로 다르마의 수행자는 불
유쾌한 상황이나 괴팍한 사람들을 맞이할 준비가 되어있어야 한
다. 세상 사람들에게 따돌림 받는 그들이니까 더욱 큰 사랑으로
감싸줘야 한다. 마음껏 베풀어도 감사하다는 말 한마디 없는 사
람들은 힘을 쭉 빠지게 만들지만, 그들이야말로 사실상 나의 스
승임을 알아야 한다. 그들은 우리의 보리심이 어느 정도 계발되
었는가를 측정해 볼 수 있는 기회를 준다. 붓다나 큰 스승이 뭇
생명의 모습으로 나투어 나를 시험해 보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
다. 매일 방 안에만 들어 앉아서 이타심의 이익에 대한 명상만
행하면 태도에 실제변화가 일어나지 않을까 우려하신 나머지.
불유쾌한 상황에서도 평소대로 남을 도울 수 있다면, 다소의
순수한 진보가 이뤄진 셈이다. 한편 그같은 상황에서 평온하게
이타심을 발휘하지 못한 사람은 자기 훈련에 더욱 분발해야 한
다. 주변에는 나를 단련시켜 줄 많은 남들이 있다. 국가가 자체
의 화력(火力)을 시험해 보고 결함이 발견되면, 더 효과적인 신
무기(新武器)를 개발하는 데 힘 쓴다. 이타심(利他心)이야말로
자기사랑(利己)의 태도를 무찌르는 무기(武器)이다. 외부의 적
은 그냥 내버려 두어도 언젠가는 죽는다. 그러나 자기 속에 있
는 자신의 사나운 적은 완전히 제거하지 않는 한 언제까지나 숨
쉰다. 깊이 생각하고 진지하게 실천하라. 이러한 교훈은 최악의
시기에 반드시 그대를 도울 것이다.
자기 사랑의 태도는 뿌리가 너무 깊어서 마치 인간 본성의 일
부분인 양 쉽게 뽑히지 않는다. 여러해를 두고 꾸준히 명상을
실천하는 동안 서서히 이타심으로 바뀌어 갈 뿐이다. 자기 자신
의 성역(聖域)을 침범한 적을 내버려 둘 사람은 없다. 그러나
묘하게도 최고로 해로운 침입자에 대해선 관대하다. 도리어 감
싸고 돈다. 이 오래묵은 몸 안에 새 마음을 심자. 그래야 자기
사랑의 태도가 이타심으로 툭 트인다.
8) 남을 나로 바꾸어 생각함
자기 사랑의 허물과 이타심의 이익을 충분히 알았다. 이제는
남을 나로 바꾸어 생각하는 마음 태도를 실제로 연습해야 한다.
내가 남으로 변하고 남이 나로 변한다는 뜻이 아니다. 나의 태
도를 가장 보편적인 수준 아래 둔다는 뜻이다. 이와같은 마음
태도에 익숙해지면 남의 고통을 나의 것으로 받아들여 함께 고
뇌하고 아파하게 된다. 남의 행복을 진정으로 축복하고 더불어
기뻐할 수 있다. 자기 자식이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면 모든 어
머니는 마치 자신의 일인 양 괴로워 한다. 자식이 즐거워 하면
어머니 역시 큰 행복을 느낀다. 자기 자신보다 자식을 더 귀중
히 여기기 때문이다. 어머니의 바꾸어 생각하는 마음 태도는 자
식인 경우에 한 하지만, 다르마의 수행에서는 모든 생명을 대상
으로 한다.
"심지어 나를 괴롭히는 생명들까지도 자기 자신으로 바꾸어
생각하는 마음 태도를 갖도록 하소서. 모든 생명을 어머니같이
여기는 마음 앞에 한량 없이 복된 삶의 문이 열려 있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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