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랲

[스크랩] 이율곡이 가르침을 구했던 송구봉

눈내리는 새벽 2018. 11. 12. 18:35

_이율곡이 가르침을 구했던 송구봉_

송구봉선생(1534~1599)은 중종 29년에 당상관(정 3품 이상) 송사련과 연일정 씨 사이에 4남 1녀 중 3남으로 태어났다. 본관은 여산(礪山), 자는 운장(雲長), 호는 구봉(龜峰)이다. 구봉(龜峰)이라는 산이 있는 경기 파주 교하면 산남리(심악산, 구봉산, 심학산)에서 태어나 성장했다. 그는 이율곡 같은 학자들과 어깨를 나란히 했으며 많은 신비한 일화들을 남겼지만 정작 역사기록에선 잘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다
그 시대는 조선의 세조~중종까지 왕의 즉위에 공을 세운 훈구파들이 거의 물러나고, 사림파 유학자들이 정권을 장악했으며, 당쟁의 분열로 동인, 서인, 남인, 북인으로 분열되기 시작하던 혼란기였다. 송구봉은 천부적으로 머리가 우수하여 이미 7세에 붓을 잡고 뛰어난 시문을 지어 주변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이후 20대까지는 성리학 학문에 열중했다. 그는 일정한 스승 없이 스스로 이치를 깨우쳐 나갔다.

20대부터 그 이름이 알려지면서 최고 문장가들과 시를 짓고 품평을 했으며 율곡 이이, 우계 성혼, 송강 정철 등과 교유하고 깊은 토론을 하며 학문을 완성해 나간다. 송구봉의 제자에는 뛰어난 인물들이 많다. 최고의 충의지사로‘조헌과 칠백의총’의 주인공 조헌과 조선후기 예학을 집대성한 김장생-김집 부자(父子)가 그에게 학문을 배웠고, 그들은 성리학을 뿌리내려 송자(宋子)라고 불렸던 우암 송시열의 스승이 된다. 송구봉은 유교 대가들의 스승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송구봉과 율곡의 얽힌 일화는 유명하다. 이율곡은 조선역사상 아홉 번 장원급제한 대천재 유학자요 정치가였다. 율곡이 젊은 시절에 천도책(天道策)으로 별시 시험에서 1등으로 합격하자 선비들이 율곡에게 수많은 질문을 던졌다. 그러자 율곡은 “송구봉의 학문이 고명하고도 넓으니 그에게 가서 물어보십시오.”라고 말했다. 그래서 선비들이 송구봉에게 몰려가 수많은 질문을 하자 그는 막힘없고 의문이 없을 정도로 완벽한 답변을 쏟아내었다. 선비들은 송구봉의 학문과 언변에 감탄하였고 그의 명성은 더욱 높아지게 되었다.

송구봉(송익필)의 동생 송한필도 문학으로 명성이 높았는데, 이율곡은 성리학을 논할 만한 사람은 오직 송구봉 형제뿐이라 말하였다. 이율곡, 성혼은 여러 의문들을 송구봉과 편지로 주고받으며 의견을 구했다 하니, 송구봉의 학문은 당대 비교상대가 없을 정도로 높은 경지였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사람들은 그에게 반할 정도로 인간적 매력과 카리스마가 넘쳤다. 지모도 깊어 남들이 전혀 생각할 수 없는 지혜를 잘 내어 주변사람을 탄복하게 만들었다. 그는 관료로 출세하지 못하고 평생을 학문연구와 후학 양성에만 힘쓰며 살았다.

부친의 악업으로 인한 불운한 운명
송구봉 집안은 고조부, 증조부는 벼슬 없이 지냈고, 조부는 말단 관직을 겨우 지냈다. 그러다 부친 대에 와서 크게 가문이 일어난다. 부친 송사련은 그의 어머니가 좌의정 안당 부친의 몸종의 딸로서 비천한 출신이다. 그는 이런 신분적 제약을 뛰어넘고자 당대 권력자 심정 밑에서 관상감 판관을 지내면서 큰 벼슬로 출세하려는 기회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던 중, 이복 외삼촌뻘 되는 안당, 안처겸 등이 조광조 선생을 모함했던 심정, 남곤 등 간신배들을 몰아내고 선생의 불명예를 되찾자는 모의를 계획하는 것을 알게 된다.

송사련은 이를 심정에게 고발하고 이로 인해 ‘신사무옥(1521년)’의 참변이 일어나 사건에 관련된 안당과 그 집안사람들이 처형된다. 송사련은 그 대가로 당상관으로 출세하고 안당집안 재산을 차지하여 한평생 권세를 누리게 된다. 그러나 그 후 무고 당했던 안당 집안의 신원(伸寃)이 회복되면서 송구봉(7세)의 인생에는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진다. 세간 사람들의 악평과 구설수에 송구봉 집안사람들은 시달리게 되지만 권세가 남아있어 큰 탈은 없었다. 그러나 송구봉은 천출(賤出)이라는 큰 장애가 있어 벼슬보다는 학문에 몰두하게 된다. 

송구봉은 50대 초반까지는 율곡, 성혼 등 절친한 친구들에게 가르침을 주어 자신의 경륜을 정치와 학문에 반영한다. 또한 훌륭한 인재들을 많이 길러내어 대학자로서 비교적 무난한 생애를 보낸다. 하지만 53세 되던 해에 이미 죽은 부친의 관작마저 삭탈당하는 불운을 당한다. 본래 국법에는 노비집안이라도 2대 이상 양역(노비 아닌 신분)을 했던 집안은 노비를
면할 수 있다는 규정이 있다. 이에 의하면 송구봉의 집안은 조부와 부친이
2대에 걸쳐 관상감 벼슬을 지냈으므로
노비를 면하게 된다. 

그러나 원한에 사무친 안당의 후손들은 송 씨 집안에게 복수할 기회만을 노린다. 그러던 중 서인계인 정철과 원수지간이던 동인계가 정철과 송구봉을 해치고자, ‘송 씨는 우리 집 몸종이다’라는 소송 건을 제기한 안당후손과 결탁하여 음모를 꾸며, 송 씨 집안의 양적(양인증명 문서)을 모두 없애버린다. 그리하여 송 씨 집안과 죽은 송사련은 법적으로 안당집안의 노비가 되고 마는데, 핍박과 가해를 피하고자 송구봉 일가는 성과 이름까지 바꾸며 뿔뿔이 도망을 간다. 안당 후손 들은 송사련의 무덤을 파헤치고 시신을 난도질한다. 

부친의 악업으로 인해 도망자 신세인 송구봉은 이를 타고난 운명이라 여긴다. 30년 지기 율곡도 죽고, 송구봉에게 거처를 마련해 주던 정철 마저 유배를 가게 되면서 송구봉의 말년은 암운이 더욱 짙어진다. 동인계인 정여립의 역모사건을 가혹 하게 처리했던 서인계의 정철에게 앙심을 품고 있던 동인들은 정여립사건 수사의 배후 조종자로 송구봉을 지목 하며 왕에게 처벌을 간한다. 이로 인해 체포령이 내리고 쫓기던 송구봉은 자수하여 유배(58~60세)를 간다. 하지만 이때 그는 이 사건에 관련된 율곡, 정철, 성혼의 명예를 불이익을 감수하고 지켜준다.  

유배에서 풀려난 후에도 노비로 만들려는 안당 후손들의 보복을 피해 고령의 몸을 이끌고 떠돌다가, 63세에 충남 당진시 원당읍 마양촌을
만년의 은신처로 삼아 정착한다. 그리고 후학들을 가르치고 학문에 열중하며 말년을 보낸다. 험난한 인생의 가시밭길에도, 송구봉은 임진왜란(1592~1598년)을 당해 고통받는 나라를 구하고자 나름대로 애써보았으나, 친구 율곡이 이미 죽고 없었기에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었다. 그리고 임진왜란이 끝난 이듬해에 66세의 일기로 인생을 마감한다. 

송구봉에 얽힌 일화들
이율곡과 송구봉 두 분의 일화는 유명하다. 이율곡은 학문은 물론이고 별자리를 보는 눈이 남달랐다.
율곡의 별은 동쪽 하늘 복판에 떠서 북두칠성보다 밝게 빛나는 별이었다. 그런데 동쪽 하늘 외진 곳에 숨어서 홀로 그윽하게 빛나는 별의 정체를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저 별도 조선의 인물로서 숨어 살고 있는 인재가 분명하니 한번 찾아봐야겠다.

율곡은 벼르던 끝에 시골 선비처럼 조촐히 차려입고 말을 타고서 길을 나섰다. 그러기를 여러 날, 율곡이 터덜터덜 말 걸음을 옮기는데 맞은편 에서 한 사람이 소를 타고 오는 게 보였다.

허름한 베옷에 삿갓 쓴 촌사람이었다. 무심코 그 사람을 바라본 율곡은 흠칫했다. 삿갓 아래에서 무언가 이상한 빛을 본 것 같았다.
율곡은 말을 걸었다. 그러자 그 사람이 소를 멈추고 삿갓을 들어 율곡을 바라보는데 그 사람 눈에서 빛이 나오는데 마치 화살이 몸에 와닿는 것 같았다. 율곡은 자기도 모르게 몸을 움칫했다. 율곡은 한눈에 그가 자신이 찾던 사람이라는 걸 깨달았다.
그는 흥분을 가라앉히고 “실례합니다. 저는 누군가 하면 . . ”말이 채 다 나오기도 전에 소 탄 사람이 껄껄 웃으면서 말했다.
“허허, 율곡선생 아니십니까?
지금 마중 나오는 길이 올시다."

둘은 매우 기쁨에 찬 인사를 나누고 산속에 있는 송구봉의 외딴 초가집으로 갔다. 방안에 마주 앉자 율곡이
“제가 둔해서 선생을 이제야 뵙게 되었습니다. 성함을 여쭈어도 되겠습니까?”그 사람이 껄껄 웃으며 “선생이라니요. 저는 송구봉이라고 합니다.”율곡은 한번 그 사람을 떠볼 겸 세상 돌아가는 일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 아침부터 시작한 이야기는 어느새 땅거미가 내려앉기 시작했다. 그동안 율곡의 가슴은 내내 쿵쿵 뛰고 있었다. 이렇게 뜻이 잘 맞는 사람은 태어나서 처음이었다. 그 후 두 사람은 말을 트고 지내는 친구가 되기로 하였다.

한 번은 선조가 가장 신임했던 이율곡이 송구봉을 조정 인재로 자주 천거하자, 마침내 선조가 만나보게 된다. 선조 앞에 불려 온 송구봉이 시종 눈을 감은 채 말을 하자 선조가,
“경은 왜 눈을 뜨지 않소?”라고 물으니
“제가 눈을 뜨면 주상께서 놀라실까 염려되어 이리하옵니다”라 대답한다. 이에 선조가 “그럴 리 있겠소?
어서 눈을 뜨시오”라 하여
송구봉이 눈을 뜨는데,
선조는 그의 안광에서 쏟아지는 강렬한 기운에 놀라 그만 용상에서 떨어졌다고 한다. 이후 선조는 그를 다시는 보지 않았다고 한다. 
  
또 임진왜란에 구원병을 끌고 온 명나라 장군 이여송은 조선을 지배하 려는 야욕을 가졌는데, 송구봉이 그 야심을 꺾은 적이 있다.
전쟁이 끝날 무렵, 한 번은 이여송과 여러 관료들이 술판을 벌이고 있었는데, 한 소년이 와서
“우리 스승님이 장군을 한번 뵙고자 합니다”한다.
이에 소년을 따라간 이여송과 수십 명의 호위병들이 깊은 산속의 한 초가 집에 이르니, 눈에 천을 감고 있는 노인과 그 옆에 한 소년을 만나게 된다.

그 노인이 “방안에 들어오시오”라고 말하자 이여송은 자신도 모르는 힘에 이끌려 방안에 들어간다. 노인은 이여송에게 술 한 잔을 따라주면서,
“그동안 조선을 위해 싸우느라 수고했소. 그러나 이제 전쟁이 끝났 으니, 딴마음먹지 말고, 그대들 나라로 돌아가시오”라고 말한다.
이에 분노한 이여송이 칼을 휘둘러 노인을 죽이려 하자, 옆에 있던 소년이 칼을 막으며 이여송의 멱살을 잡고 밖으로 내던져 버린다.
이에 이여송과 수십 명의 병사들이 노인과 소년을 공격하자, 노인이 천을 벗고 매서운 눈초리로 그들을 쏘아보 니, 번개 같은 기운이 뿜어져 나와 그들이 쓰러지게 된다. 노인은
“장군은 이 아이 하나도 못 꺾으면서 어찌 나를 대적하겠소? 장군은 이제 천하에 이름을 떨쳤으니 나쁜 생각 먹지 말고 돌아가기 바라오.
그렇지 않으면 장군은 쥐도 새도 모르게 죽을 수도 있소”라고 말한다. 이에 겁을 먹은 이여송은 도망치듯 말을 타고 군영으로 돌아갔고
그해에 서둘러 철군을 한다. 


이밖에도 이순신에게 거북선 제조법을 가르쳐준 이야기, 김덕령을 훌륭한 장수로 가르친 이야기, 남명 조식과 교유하며 임진왜란을 대비한 이야기, 퇴계 이황의 만사(輓詞)를 써준 이야기 등 숱한 일화와 전설이 전해오고 있다. 그리고 일화의 대부분이 임진왜란을 전후하여 국난에 대비하고 인재를 양성하는 내용들이다.

어느 날 송구봉은 정색을 하면서 율곡에게 말했다.
“부탁이 하나 있네. 편지를 전할 곳이 있는데 자네가 대신 수고해 주게나. 나라의 운명이 걸린 중요한 일일세.
”율곡은 선뜻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지. 어디 사는 누구한테 보내는 편지인가?”
“저 소를 타고 가다 보면 자연히 알게 될 걸세.”구봉은 마당에서 여물을 먹고 있는 소를 가리켰다.
“아직 소는 타 본 적이 없는걸.”
“아마 자네 말보다 나을 걸세. 길에서 이상한 젊은이를 하나 만나게 될 거야. 그 사람을 꼭 데리고 가도록 하게나.
”수수께끼 같은 이야기였지만, 구봉을 믿는 율곡은 더 묻지 않았다. 편지를 소매에 넣고 소에 올라탔다. 처음엔
영 마뜩하지 않았는데, 타고 보니 정말로 편안하기가 말보다 나았다. 게다가 소가 느릿느릿 걷는데도
한 걸음을 옮길 때마다 앞으로 쭉쭉 나아가지 않는가. 십 리, 이십 리가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갔다.
“어허, 이 소가 축지법을 쓰는군.”소는 강원도로 들어선 후 북쪽으로 길을 잡아 높고 아름다운 산에 이르렀다.
‘여기는 금강산이 아닌가!’ 구봉의 소가 찾아간 곳은 민족의 영산 금강산이었다. 한참을 그렇게 가는데 맞은편에서 말을 타고 다가오는 사람이 있었다. 잠시 후 두 사람은 서로 마주치고 보니 참 곤란한 일이 생겼다. 길이 워낙 좁아서 서로 비켜갈 수가 없었다. 소와 말도 서로 멀뚱멀뚱 바라만 보았다.
‘어허, 이 일을 어쩐담?’ 율곡이 어찌할 바를 몰라하는데, 그 젊은이가 말에서 훌쩍 뛰어내렸다. 그는 말의 다리를 한 손에 두 개씩 모아 쥐더니 말을 머리 위로 번쩍 들어 올리고서 한쪽으로 바짝 비켜섰다.
덕분에 율곡은 소를 탄 채 길을 계속 갈 수 있었다. ‘참 이상하고 놀라운 젊은이야.’ 이렇게 생각하며 얼마쯤 길을 가던 율곡은 속으로 아차! 했다. 젊은이를 데리고 가라고 한 구봉의 말이 뒤늦게 떠오른 것이다.
얼른 뒤를 돌아보니 젊은이는 저만치 멀어져 있었다. 율곡은 급히 젊은이를 불렀다.
“이보게 젊은이, 나 좀 잠깐보세나!”
그러자 젊은이는 말없이 말을 멈추고는 아까처럼 말을 들어 올려 방향을 바꾸어 율곡에게로 다가왔다.
“나하고 어디 좀 같이 가세나.”그러자 젊은이는 말없이 율곡의 뒤를 따랐다. 아주 입이 무거운 젊은이였다.
험한 산길을 한참 올라타니 한쪽에는 폭포수가 아득히 떨어져 내리고,
그 옆에는 수백 년 복숭아나무가 화사하게 꽃을 피워 분홍빛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다.
그 꽃 그림자 아래 너른 바위에는
흰 수염을 길게 늘어뜨린 노인 넷이 앉아서 바둑을 두고 있었다.
율곡과 젊은이는 조심스럽게 그리로 다가갔다. 율곡은 뛰는 가슴을 진정 하며 조심스레 인사를 올렸다.
“문안드리겠습니다.”그제서야 한 노인이 돌아보면서 말을 던졌다.

“그래, 속세 사람이 여기는 웬일인고?”율곡은 소매 속에서
구봉이 써준 편지를 꺼내 노인에게 건넸다. 노인은 편지를 읽고 나서
다른 노인들에게 말했다.
“이거 문곡이 보낸 편지구먼.”그 말에 율곡은 비로소 송구봉이 문곡성의 정기를 받은 인물임을 깨달았다. 문곡성의 기운을 띠고 태어나면 큰 학자가 된다고 한다. 다른 노인이 말했다.
“그래, 문곡이 뭐라 적었는가?”
“장차 조선에 닥칠 왜란을 막아 달라는구먼.”그러자 노인들이 돌아가며 한 마디씩 거들기 시작했다.
“그거야 하늘의 뜻인 걸 우리가 어쩐단 말인가?”
“그래도 문곡의 부탁인데 모른 척할 수는 없지 않은가?”
“나라에서 구봉이나 김덕령 같은 인재를 제대로 쓰면 금방 전쟁이 끝나련만.”
“이러면 어떻겠나? 왜란을 15년에서 8년을 줄여준다면”
“그게 좋겠군. 아무래도 7년의 전란은 피할 수 없어.”노인들의 대화를 유심히 듣고 있던 율곡은 깜짝 놀랐다. ‘우리나라에 장차 왜란이 나서 7년이나 전쟁을 하게 된단 말인가.’ 그때 다시 한 노인이 말을 꺼냈다.
“그런데 누구를 시켜서 7년 만에 왜란을 끝내게 한단 말인가”
고민스러운 듯 수염을 쓰다듬던 노인이 문득 말고삐를 붙들고 서 있는 젊은이를 가리키며 소리쳤다.
“옳지! 저기 인재가 있구먼!”노인들은 종이를 꺼내더니 머리를 맞댄 채 열심히 무언가를 만들기 시작했다. 이리 접고 저리 접기를 한참을 하더니 마침내 완성이 됐는지 젊은이를 불러서 주었다.
“여보게 젊은이, 이걸 받게.”노인들이 만든 것은 물에 띄우는 배였다. 그런데 그 모양이 아주 특이했다. 용처럼 생긴 머리가 앞쪽에 솟아있고 거북등 모양의  배 지붕에는 송곳이 삐죽삐죽 솟아 있었다. 배 옆구리에는 여러 개의
노가 삐쳐 나와 있었다. 그것은 바로 거북선의 모형이었다. 지금 이 배를 받아 든 젊은이가 바로 이순신이었다. 임진왜란이 나자 거북선을 거느리고 바다에서 왜군을 크게 무찔러 민족을 구한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었다. 

현존하는 송구봉에 대한 학술적 평가는 당쟁에 휘말려 불우했던 지식인에 그친다. 하지만 야사에 전해진 그의 모습은 제갈공명을 뛰어넘는 신비한 이적과 선술(仙術)의 소유자로서 국난을 걱정하고 대비했던 인물이다. 시골 노인들은 송구봉선생 이야기를 꺼내면,
“그때, 그 어른이 조그만 벼슬만 했어도 그까짓 왜놈들 단번에 쓸어버렸을 거야”라고 말하곤 했다 한다.
당시 유불선을 대표하는 인물에는 송구봉, 최풍헌, 진묵대사 세 사람이 있고 이들은 공통점이 있다. 그들은 모두 천지의 기운을 받고 태어났으며 높은 도력을 지녔던 인물들이다.  

최풍헌은 선조에게‘병권을 3일만 허락하면 왜병을 3일 내에 전멸하겠 다.’고 하였으나 끝내 허락받지 못해 조화권을 쓰지 못하고 통탄했다는 전설이 내려온다.
진묵대사는 뛰어난 도력을 지녔으나 몸을 두고 시해(屍解)로 어디론가 간 사이 김봉곡에 의해 억울한 죽음을 당한다. 송구봉은 천하를 경륜할 만한 재주를 지녔지만, 부친의 악업과 출생 의 한계로 그 재주를 제대로 펼치지 못했다. 이들은 어리석은 군주와 당파 싸움으로 인해 전란이 닥친 나라에 능력을 발휘하지 못했던 것이다. 사람이 큰일을 하려면 시대를 잘 타고나야 하고 지도자를 잘 만나야 한다 ♧

출처 : 민 의 보 감
글쓴이 : 며루치 원글보기



https://m.mk.co.kr/news/culture/8241022
.  
고구려

귀한 수정(水晶)으로 축구장 16배 크기 건물을 지었던 고구려 - 매일경제

[고전으로 읽는 우리역사-38] "고구려는 오직 왕궁과 관청, 사찰만 기와로 덮었다. 고구려의 왕궁 안에는 수정성(水晶城)이 있는데 사방이 1리가량 되며 날씨가 좋지 않아도 밝기가 대낮과 같다.

www.m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