意識-書

삼국지 고사성어 44개

눈내리는 새벽 2018. 10. 15. 23:58




  

 


1.개과천선 [改過遷善] - 잘못 들어선 길을 버리고 착한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겠다 는 결의를 실천하여 마침내 이룩함을 이르는 말. 改 : 고칠 개 過 : 허물 과 遷 : 옮길 천 善 : 착할 선 《진서(晉書)》 〈본전(本傳)〉에 있는 입지담(立志談)이다.  진 혜제때 양흠지방에 괴걸이 나타났는데 그의 이름을 주처라 불렀다. 주처의 아버지 주방이 동오, 파양 태수를 지낸 바 있어 따지고 보면 주처도 양반 세문의 자제였다. 그러나 불행히도 주처가 여남은 살 때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다. 주처는 아버지의 가르침과 보살핌을 잃은 뒤부터 점점 외곬으로 나아가 하루 종일 할일 없이 방랑생활을 하며 나쁜짓이라고는 안하는 것이 없었다. 게다가 그는 어려서부터 남달리  몸이 강인하고 팔 힘은 보통사람이 따르지 못하였다. 그래서 마을에서는 천하 패자 격으로 남을 두드려 패기가 일쑤고 야만 행위를 자행하는 등 그야말로 불량소년으로 마을 사람들은 그를 두려 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주처가 차차 자라면서 마을 사람들이 점점 그를 미워했고 그를 멀리하자, 주처도 자연히 철이 들어 자신의 과오를 깨달았음인지 지난 허물을 과감히 고치어 새로운 사람이 되겠다고 굳은 결심을 하였다. 하루는 마을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지금 세상이 편안하여 모두들 의식 걱정없이 잘  사는데 왜 당신들은 나만 보면 낯을 찡그리십니까?" 이때 어느 대담한 마을 사람이 대답했다. "세가지 해로움도 제거하지 못했는데 어찌 태평을 논할 수 있겠나?" "세가지 해로움이라니요?" 주처는 이상히 여겨 물었다. "남산에 있는 사나운 호랑이, 장교 아래 있는 교룡, 그리고 주처, 자네를 합해서 세 가지 해로움을 말하는 걸세" 주처는 귀에 거슬리는 마을 사람들의 말을 듣고는 더욱 새로운 사람이 되어야겠다는 각오를 굳게 가졌다. 그리고는 격동한 어조로 다짐했다. "제가 반드시 그 세가지 해로움을 제거할 것입니다.


" 마을 사람들은 주처가 삼해를 없애겠다는 말을 듣고 마음 속으로 다행한 일이라고 제각기 경하해 마지 않았다. 두 호랑이가 싸우면 반드시 하나가 상하는 소위 법인데 삼해를 한꺼번에 제거치 못하더라도 한 두 가지의 해로움을 없앨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모두들 이구동성으로 그를 격려했다. 그리하여 주처는 칼을 차고 남산에 올라가 맹호를 잡아 죽였다. 바로 이어 주처는 또 장교아래 물에 뛰어 들어 교룡과 싸움을 벌였는데 사흘 밤낮이 지나도 주처는 돌아오질 않았다. 마을 사람들은 주처가 이미 교룡에게 잡혀 먹힌 줄 알고 모두 손을 들어 환호하며 어쩔 줄을 몰랐다. 그러나 악전고투 끝에 주처는 교룡을 죽이고 살아 돌아왔으나 마을 사람들은 별로 반갑게 여기는 것 같지가 않자,,, 주처는아직도 자기에 대하여 미움을 지니고 있음을 깨닫고 더욱더 허물을 벗고 착한 사람이 되겠다는 마음의 각오를 굳게 다졌다. 드디어 그는 정든 고향을 등지고 동오에 가서, 대학자 육기와 육운 두 형제를 만나보고 육운에게 솔직 담백하게 이야기했다 "전에 저는 나쁜 짓을 헤아릴 수 없이 많이 했습니다. 그러나 지금 저는 뜻을 세워 착한 사람이 되려고 합니다. 그러나 나이가 들고 너무 늦은 감이 있는것이 가장 두렵습니다.

"이에 육기는 "자네는 나이가 아직 젊네!" 그러자 육운이 격려하기를. "자네가 굳은 의지를 지니고 지난 허물을 고치며 새로이 착한 삶이 된다면 자네의 앞길은 무한한 것 일세." 주처는 이에 용기를 얻어, 이후 10여 년 동안 학문과 덕을 익혀 마침내 유명한 대학자가 되었다는데서 유래하였으니. 개과자신(改過自新)이라고도 한다. 공자는 '허물을 고치지 않는 것이 더 큰 허물이며, 허물을 알았으면 고치기를 꺼리지 말라'고 하였다. 개과천선 改過遷善-지난 허물을 고치고 착하게 됨./ 改 고칠 개, 過 허물 과, 遷 옮길 천, 善 착할 선


2. 고육지계苦肉之計-제 몸을 괴롭혀가면서까지 어려운 상황에서 벗어나려고 하는계책 삼국시대의 주유(周瑜)는 오(吳)나라 장수로 지모가 뛰어났다. 조조(曹操)의 위(魏)나라 수군 도독인 채모와 장윤은 주유의 계략에 빠져 조조에게 참살 당했고 뒷날 조조가 가슴을 쳤을 때는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조조는 오나라를 공략하기 위해 장강(長江·양자강)에 수십만 대군을 배치했다. 유명한 적벽(赤壁)대전의 서막이었다. 도저히 승산이 없다고 본 주유는 궁여지책으로 화공(火攻)작전을 세워 보았다. 주유는 노장 황개(黃蓋)와 머리를 맞대고 각본을 짰다. 거짓 항복하는 이른바 사항계(詐降計)를 쓰기로 한 것이다. 황개가 주역인 연극은 시작되었다. 작전 회의에서 황개가 비장한 어조로 말했다. "조조의 대군을 도저히 이길 수 없소. 항복하는 게 좋을 것 같소." 황개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벽력같은 주유의 호통소리가 나왔고 곧이어 황개는 곤장형에게 처해졌다. 살갗이 터져 유혈이 낭자한 처절한 체형(體刑)이었다. 이 모습을 전해 들은 촉(蜀)나라의 제갈량(諸葛亮)은, "자신의 몸에 고통을 가하는 고육의 계책을 쓰지 않고는 조조를 속일 수 없었겠지. (不用苦肉計 何能瞞過曹操)" 라고 했다고 한다. 황개는 심복 부하를 시켜 거짓 항복 편지를 조조에게 전하게 했다. 편지를 읽어본 조조는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다. 첩자로 오나라 군부에 박혀 있다가 자초지종을 지켜본 채모의 두 동생이 보낸 보고서의 항복 이유가 일치했기 때문이었다. 뒤에 귀순을 가장한 황개는 인화물을 실은 배를 몰고 가 조조군의 선단(船團) 에 부딪히게 해서 화염에 휩싸이게 했다. 이리하여 고육지계(苦肉之計)는 성공했고 오(吳)는 위(魏)에 대승을 거두었다.


3. 곡학아세 曲學阿世 학문을 굽히어 세속(世俗)에 아첨한다는 뜻으로, 정도(正道)를 벗어난 학문으로 세상 사람들에게 아첨함. 한(漢)나라 6대 황제인 경제(景帝:B.C 157-141)는 즉위하자 천하에 널리 어진 선비를 찾다가 산동(山東)에 사는 원고생(轅固生)이라는 시인을 등용하기로 했다. 그는 당시 90세의 고령이었으나 직언을 잘하는 대쪽 같은 선비로도 유명했다. 그래서 사이비(似而非) 학자들은 원고생을 중상비방(中傷誹謗)하는 상소를 올려 그의 등용을 극력 반대하였으나 경제는 끝내 듣지 않았다. 당시 원고생과 함께 등용된 소장(少壯) 학자가 있었는데, 그 역시 산동 사람으로 이름을 공손홍(公孫弘)이라고 했다. 공손홍(公孫弘)은 원고생을 늙은이라고 깔보고 무시했지만 원고생은 전혀 개의치 않고 공손홍(公孫弘)에게 이렇게 말했다. "지금, 학문의 정도(正道)가 어지러워져서 속설(俗說)이 유행하고 있네. 이대로 내버려 두면 유서 깊은 학문의 전통은 결국 사설(私設)로 인해 그 본연의 모습을 잃고 말 것일세. 자네는 다행히 젊은 데다가 학문을 좋아하는 선비란 말을 들었네. 그러니 부디 올바른 학 문을 열심히 닦아서 세상에 널리 전파해 주기 바라네. 결코 자신이 믿는 '학설을 굽히어 [曲學]' 이 '세상 속물들에게 아첨하는 일[阿世]'이 있어서는 안 되네." 원고생의 말이 끝나자 공손홍은 몸둘 바를 몰랐다. 절조를 굽히지 않는 고매한 인격과 학식이 높은 원고생과 같은 눈앞의 태산북두(泰山北斗)를 알아 보지 못한 자신이 부끄러 웠기 때문이다. 공손홍은 당장 지난날의 무례를 사과하고 원고생의 제자가 되었다고 한다. 固之徵也 薛人公孫弘亦徵 側目而視固 固曰 公孫子務正學以言 無曲學以阿世. 曲 굽을 곡. 學 학문 학. 阿 아첨할 아. 世 인간, 세대 세.


4. 관포지교 管鮑之交 중국의 관중(管仲)과 포숙아(鮑叔牙) 같은 친교라는 뜻으로, 시세(時勢)를 떠나 친구를 위하는 두터운 우정을 일컫는 말. 춘추시대 초엽, 제(齊)나라에 관중(管仲 : ?∼B.C 645)과 포숙아(鮑叔牙)라는 두 관리가 있었다. 이들은 죽마고우(竹馬故友)로 둘도 없는 친구사이였다. 관중이 공자(公子) 규(糾)의 측근으로, 포숙아가 규의 이복 동생인 소백(小白) 의 측근으로 있을 때 공자의 아버지 양공(襄公)이 사촌 동생 공손무지 (公孫無知)에게 시해되자(B.C. 686) 관중과 포숙아는 각각 공자와 함께 이웃 노(魯) 나라와 거나라로 망명했다. 이듬해 공손무지가 살해되자 두 공자는 군위(君位)를 다투어 귀국을 서둘렀고 관중과 포숙아는 본의 아니게 정적이 되었다. 관중은 한때 소백을 암살하려 하였으나 소백이 먼저 귀국하여 환공(桓公 : B.C 685-643) 이라 일컫고 노나라에 공자 규의 처형과 아울러 관중의 압송(押送)을 요구했다. 환공이 압송된 관중을 죽이려 하자 포숙아는 이렇게 진언했다. "전하, 제(齊) 한 나라만 다스리는 것으로 만족하신다면 신(臣)으로도 충분할 것이옵니다. 하오나 천하의 패자(覇者)가 되시려면 관중을 기용하시옵소서." 도량이 넓고 식견이 높은 환공은 신뢰하는 포숙아의 진언을 받아들여 관중을 대부(大夫)로 중용(重用)하고 정사를 맡겼다 한다. 이윽고 재상이 된 관중은 과연 대정치가다운 수완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창고가 가득 차야 예절을 안다 [倉弟實則 知禮節]' '의식이 풍족해야 영욕을 안다 [衣食足則知榮辱]'고 한 관중의 유명한 정치철학이 말해 주듯, 그는 국민 경제의 안정에 입각한 덕본 주의(德本主義)의 선정을 베풀어 마침내 환공으로 하여금 춘추(春秋)의 첫 패자로 군림케 하였다. 이같은 정치적인 성공은 환공의 관용과 관중의 재능이 한데 어우러진 결과이긴 하지만 그 출발점은 역시 관중에 대한 포숙아의 변함없는 우정에 있었다. 관중은 훗날 포숙아에 대한 감사한 마음을 이렇게 술회하고 있다. "나는 젊어서 포숙아와 장사를 할 때 늘 이익금을 내가 더 많이 차지했었으나 그는 나를 욕심장이라고 말하지 않았다. 내가 가난하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또 그를 위해 한 사업이 실패하여 그를 궁지에 빠뜨린 일이 있었지만 나를 용렬하다고 여기지 않았다. 일에는 성패(成敗)가 있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또 벼슬길에 나갔다가는 물러 나곤 했었지만 나를 무능하다고 말하지 않았다. 내게 운이 따르고 있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디 그뿐인가. 나는 싸움터에서도 도망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지만 나를 겁쟁이라고 말하지 않았다. 내게 노모(老母)가 계시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무튼 『나를 낳아 준 분은 부모이지만 나를 알아준 사람은 포숙아이다.』" (生我者父母 知我 者鮑叔也) 管 대롱 관. 鮑 절인 고기 포. 之 갈 지(, , , 의). 交 사귈 교.


5. 구사일생 九死一生 여러 차례 죽을 고비에서 헤매다가 겨우 살아남. "굴평은 (굴원의 이름) 임금이 신하의 말을 듣고 분간하지 못하고 참언과 아첨하는 말이 왕의 밝은 지혜를 가리고, 간사하고 비뚤어진 말이 임금의 공명정대함을 상처 내어 마음과 행실이 방정한 선비들이 용납되지 않는 것을 미워했다. 그리하여 근심스러운 생각을 속에 달아 이소 한편을 지었다." 이 이소의 제 6단에, 다음과 같은 1절이 있다. '길게 한숨 쉬며 눈물을 닦으며, 인생의 어려움 많음을 슬퍼한다. 그러나 자기 마음이 선 하다고 믿고 있기 때문에 비록 아홉 번 죽을 지라도 오히려 후회하는 일은 하지 않으리라' 이 에 대하여, 문선을 편찬한 유량주는 이렇게 말했다. "아홉은 수의 끝이다. 충성과 신의와 곧음과 깨끗함, 이 네 마음이 선하고자 하는 바이니, 이해를 만남으로써, 아홉 번 죽어서 한번을 살아나지 못한다. 할지라도, 아직 후회하고 원한을 품기에는 족하지 못하다." 구사일생은 유량주가 말한 "아홉 번 죽어서 한번 살지를 못한다." 에서 나온 것으로, 열번 중에서 아홉 번까지는 별로 도움을 주지 못한다. 는 뜻이기도 하며 죽을 고비를 여러 차례 넘기고 간신히 살아난다. 는 뜻이다.


6. 勸善懲惡 착한 일을 권장하고 악한 일을 징계함. 노(魯)나라 성공(成公) 14년 9월에 제(齊)나라로 공녀(公女)를 맞이하러 가있던 교여(僑如 : 宣伯)가 부인 강씨(姜氏)를 제나라로 데리고 돌아왔다. 교여라고 높여서 부른 것은 부인을 안심시켜 슬며시 데리고 오기 위해서였다. 이보다 앞서 선백(宣伯)이 제나라로 공녀(公女)를 맞이하러 갔었을 때는 선백을 숙손(叔孫)이라고 불러 군주(君主)의 사자로 높여 부르는 방법을 사용했다. 그러므로 군자(君子)는 이렇게 말한다. "춘추(春秋) 시대의 호칭은 알기 어려운 것 같으면서도 알기 쉽고, 쉬운 것 같으면서도 뜻이 깊고, 빙글빙글 도는 것 같으면서도 정돈되어 있고, 노골적인 표현을 쓰지만 품위가 없지 않으며, 악행을 징계하고 선행을 권한다.[勸善懲惡] 성인이 아니고서야 누가 이렇게 지을 수 있겠는가?" '권선징악(勸善懲惡)'은 여기서 유래되었다.


7. 금란지교 金蘭之交 ① 다정한 친구 사이의 정의(情義) ② 다정한 친구 사이의 교제(交際) "사람들과 한가지로 하여 먼저는 울부짖고 뒤에는 웃는다……." 공자는 말씀하셨다. "군자의 도는 혹은 나가 벼슬하고 혹은 물러나 집에 있으며 혹은 침묵을 지키지만 혹은 크게 말한다. 두 사람이 마음을 하나로 하면 그 날카로움이 쇠를 끊고 마음을 하나로 하여 말하면 그 향기가 난초와 같다." 同人 先號宖而後笑 子曰 君子之道 惑出惑處 惑默惑語 二人同心 其利斷金 同心之言 其臭如蘭. (易經繫辭上傳) 몹시 친밀한 사이를 [금란지교(金蘭之交)]라고 말하는 것은 여기에서 나온 것이다. 또 친구 사이의 사귐이 굳은 것을 [금란지교(金蘭之交)]라고 하는 말은 백낙천(白樂天)의 시구에도 나온다.


8. 누란지위 累卵之危 알을 쌓아(포개) 놓은 것처럼 위태로운 형세의 비유. 전국시대, 세 치의 혀[舌] 하나로 제후를 찾아 유세(遊說)하는 세객(說客)들은 거의 무두 책사(策士) 모사(謀士)였는데, 그 중에서도 여러 나라를 종횡으로 합쳐서 경륜하려던 책사 모사를 종횡가(縱橫家)라고 일컬었다. 위(魏)나라의 한 가난한 집 아들로 태어난 범저(范雎)도 종횡가를 지향하는 사람이었으나 이름도 연줄도 없는 그에게 그런 기회가 쉽사리 잡힐리 없었다. 그래서 우선 제(齊)나라에 사신으로 가는 중대부(中大夫) 수가(須賈)의 종자(從者)가 되어 그를 수행했다. 그런데 제나라에서 수가보다 범저의 인기가 더 좋았다. 그래서 기분이 몹시 상한 수가(須賈)는 귀국 즉시 재상에게 '범저는 제(齊)나라와 내통하고 있다' 고 참언(讒言)했다. 범저는 모진 고문을 당한 끝에 거적에 말려 변소에 버려졌다. 그러나 그는 모사(謀士)답게 옥졸을 설득, 탈옥한 뒤 후원자인 정안평(鄭安平)의 집에 은거하며 이름을 장록(張祿)이라 바꾸었다. 그리고 망명할 기회만 노리고 있던 중 때마침 진(秦)나라에서 사신이 왔다. 정안평은 숙소로 은밀히 사신 왕계(王稽)를 찾아가 장록을 추천했다. 어렵사리 장록을 진나라에 데려온 왕계는 소양왕(昭襄王)에게 이렇게 소개했다. "전하, 위나라의 장록 선생은 천하의 외교가이옵니다. 선생은 진나라의 정치를 평하여 '알을 쌓아 놓은 것보다 위태롭다.(危於累卵)'며 선생을 기용하면 국태민안(國泰民安)할 것이라고 하였사옵니다." 소양왕은 이 불손한 손님을 당장 내치고 싶었지만 인재가 아쉬운 전국시대 이므로 일단 그를 말석에 앉혔다. 그후 范雎[張祿]은 '원교근공책(遠交近攻策) '으로 그의 진가를 발휘했다. 累 여러, 포갤 루. 卵 알 란. 之 갈 지(…의). 危 위태할 위.


9. 다다익선 多多益善 -많을수록 더욱 좋음. 한(漢)나라 고조 유방(劉邦)은 명장으로서 천하통일의 일등공신인 초왕(楚王) 한신을 위험한 존재로 여겼다. 그래서 계략을 써 그를 포박한 후 회음후(淮陰候)로 좌천시키고 도읍 장안 (長安)을 벗어나지 못하게 했다. 어느날, 한(漢) 고조(高祖)는 한신과 여러 장군들의 능력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던 끝에 한신에게 이렇게 물었다. "과인은 몇 만의 군사를 통솔할 수 있는 장수감이라고 생각하오?" "아뢰옵기 황공하오나 폐하께서는 한 10만쯤 거느릴 수 있으실 것으로 생각하나이다." "그렇다면 그대는?" "예, 신(臣)은 '다다익선(多多益善)'이옵니다." 高帝嘗與韓信言諸將能否 各有差 上問曰 如我能將幾何臣曰 陛下不過能將十萬 上曰 於君何如 曰 臣多多而益善耳. "다다익선? 핫핫핫……." 고조는 한바탕 웃고 나서 물었다. "다다익선이란 그대가 어찌하여 10만의 장수감에 불과한 과인의 포로가 되었는고?" 한신은 이렇게 대답했다. "하오나 폐하, 그것은 별개의 문제이옵니다. 폐하께서는 병사의 장수가 아니오라 장수(將帥)의 장수(將帥)이시옵니다. 이것이 신이 폐하의 포로가 된 이유의 전부이옵니다." 多 많을 다. 益 더할 익. 善 착할, 좋을, 잘할 선.


10. 대기만성 大器晩成 - 그릇은 늦게 만들어진다는 뜻. ① 크게 될 사람은 늦게 이루어짐의 비유. ② 만년(晩年)이 되어 성공하는 일. ③ 과거에 낙방한 선비를 위로하여 이르던 말. ⑴ 三國志 '魏志'에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실려 있다. 삼국시대, 위(魏)나라에 최염(崔琰)이라는 풍채 좋은 유명한 장군이 있었다. 그러나 그의 사촌 동생인 최림(崔林)은 외모가 시원치 않아서인지 출세를 못하고 일가 친척들로 부터도 멸시를 당했다. 하지만 최염만은 최림의 인물됨을 꿰뚫어 보고 이렇게 말했다. "큰 종(鐘)이나 솥은 그렇게 쉽사리 만들어지는 게 아니네. 그와 마찬가지로 큰 인물도 대성(大成)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너도 그처럼 '大器晩成' 하는 그런 형이야. 두고 보라구. 틀림없이 큰 인물이 될 테니……." 과연 그 말대로 최림은 마침내 천자(天子)를 보좌하는 삼공(三公) 중의 한 사람이 되었다. ⑵ 後漢書에 보면, 후한을 세운 광무제(光武帝 : 25-57)때 마원(馬援)이란 명장이 있었다. 그는 변방의 관리로 출발하여 복파장군(伏波將軍)까지 된 인물이데, 복파장군 이란 전한(前漢) 이후 큰 공을 세운 장군에게만 주어지는 칭호이다. 마원이 생전 처음 지방관리가 되어 부임을 앞두고 형인 최황(崔況)을 찾아가자 그는 이렇게 충고했다. "너는 이른바 '大器晩成'형이야. 솜씨 좋은 대목이 산에서 막 베어 낸 거친 원목을 시간과 노력을 들여 좋은 제목으로 다듬어 내듯이 너도 네 재능을 살려 꾸준히 노력하면 큰 인물이 될 것이다. 부디 자중(自重)하라." ⑶ 老子에도, '큰 네모(四角)는 모서리가 없으며 큰그릇은 늦게 만들어진다(大方無隔 大器晩成)는 말이 있다. 큰 인물은 짧은 시간에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大 클 대. 器 그릇 기. 晩 늦을 만. 成 이룰 성.


11. 마이동풍馬耳東風 -말의 귀에 동풍(東風:春風)이 불어도 전혀 느끼지 못한다는뜻. ① 남의 말을 귀담아 듣지 않고 그대로 흘려 버림의 비유. ② 무슨 말을 들어도 전혀 느끼지 못함의 비유. ③ 남의 일에 상관하지 않음의 비유. 왕십이(王十二)가‘쓸쓸한 밤 홀로 술을 마시며 회포에 잠긴다. '한야독작유회 (寒夜獨酌有懷)'’라는 자신의 불우한 처지를 읊은 시를, 이백이‘왕십이의 한야독작유회에 답한 '답왕십이한야독작유회(答王十二寒夜獨酌有懷)' 라는 장편의 시(詩) 가운데 있는 말이다. "푸른 산을 둘러싸고 뜬구름이 하염없이 이어져 있고, 그 하늘 가운데 외로운 달이 흐르고 있다. 외로운 달은 추위에 못 이겨 빛나고, 은하수는 맑고 북두칠성은 흩어져 깔려 있는데, 밤의 많은 별들이 밝게 빛난다. 나는 술을 마시면서 밤 그늘 서리의 하얀 것을 생각하고, 자네의 집 우물의 구슬 난간에 얼음이 얼어붙은 모양을 생각하고, 얼어붙은 자네의 마음을 생각했다. 인생은 아차 하는 사이에 백년도 채우지 못한다. 자, 술이나 마셔 한없는 생각을 떨쳐 버리게. 우리들이 할 수 있는 일은, 햇볕이 쪼이지 않는 북쪽 창문 속에서, 시를 읊거나 부(賦)를 짓는 정도의 일일세. 일 만 마디를 지어도 고작 술 한 잔의 가치도 없네." 그리고 나서 李白은 이렇게 읊고 있다. 세상 사람들이 이 말을 들으면 다 머리를 흔들 걸세. 동풍(東風)이 말의 귀를 쏘는 것 같음이 있네. 世人聞此皆掉頭 有如東風射馬耳 馬 말 마. 耳 귀 이. 東 동녘 동. 風 바람 풍.


12. 백수건달 白手乾達 -아무 것도 없이 난봉을 부리고 돌아 다니는 사람. 불교 문헌에서는 음악을 맡은 천신(天神)을 ‘건달박(乾達縛)’ 또는 ‘건달바(乾達婆)’라고 부르는데, 식향(食香), 심향행(尋香行), 향음(香陰), 향신(香神)으로 의역되기도 한다. 의역의 경우 향(香)자가 모두 들어간 이유는 그 천신이 향 만을 먹으며 유유히 산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전설에 따르면 건달바는 술과 고기를 먹지 않으며 오직 향기만을 먹고 산다고 한다. 이들은 원래 브라만교에서 숭배하던 여러 신 가운데 하나로서, 불교 경전에서는 동방을 수호하는 신으로 간주하며, 또 욕계(欲界)의 중음신(中陰神) 을 가리키기도 한다. 욕계의 중생이 죽고 나서 아직 새로운 육체를 얻기 이전인 중음신 상태에서는 오직 향기만을 먹으므로 이렇게 부른다. 이 가운데 복이 적은 자는 나쁜 향기를 먹으며, 복이 많은 자는 좋은 향기를 먹는다. 절에 다니는 신도들이 향을 피우는 것은 건달박에게 봉양하는 행위에서 비롯된 풍습이다. 이 건달바에 빗대어‘하는 일 없이 빈둥대는 사람’을 건달이라 부르게 되었다.


13. 살신성인 殺身成仁 -절개를 지켜 목숨을 버림. 자신의 몸을 죽여 인을 이룬다. 자기의 몸을 희생하여 옳은 도리를 행하다. 이 말은 춘추시대, 인(仁)을 이상적 덕목으로 삼는 공자(孔子)의 언행을 수록한 논어(論語) 위령공편(衛靈公篇)에 나오는 한 구절이다. 높은 뜻을 지닌 선비와 어진 사람은 志士仁人(지사인인) 삶을 구하여 '인(仁)'을 저버리지 않으며 無求生以害仁(무구생이해인) 스스로 몸을 죽여서 '인(仁)'을 이룬다. 有殺身以成仁(유살신이성인) 공자 사상의 중심을 이루는 '인(仁)'의 도는 제자인 증자(曾子)가 논어(論語) 이인편(里仁篇)에서 지적했듯이 '충(忠)'과 '서(恕)'에 귀착한다. 부자(夫子:공자에 대한 경칭)의 도(道)는 '충(忠)', '서(恕)'일 뿐이다. 夫子之道 忠恕而已矣. (부자지도 충서이이의) '충(忠)'이란 자기자신에게 최선을 다하는 정신이고, '서(恕)'란 '충(忠)'의 정신을 그대로 타인에게 미치게 하는 마음이다. 증자(曾子)는 공자(孔子)의 '인(仁)'이 곧 이 '충서(충서)'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았다. [주] 증자: 춘추 시대의 유학자(儒學者). 이름은 삼(參), 자(字)는 자여(子與) 높이어 증자(曾子)라고 함. 공자의 제자 중에서 가장 나이가 어렸으나 효성이 지극하고 행동거지 (行動擧止)가 온후독실(溫厚篤實)해서 죽을 때까지 몸에 작은 상처 하나 남기지 않았다고 함. 공자의 덕행과 학설을 정통으로 주술(祖述)하여 공자의 손자 자사(子思:孔汲)에게 전했음. 맹자는 자사의 계통을 이은 것으로 알려짐.《효경(孝經)》의 저자라고 알려 짐.(B.C. 505∼436). 殺 죽일 살. 身 몸 신. 成 이룰 성. 仁 어질 인.


14. 아수라장 阿修羅場 피비린내 나는 아수라의 싸움터. 아수라(阿修羅)는 범어(梵語) 'asura'의 음역(音譯)이다. 약칭 수라(修羅)라고도 하며 또 아소라(阿素羅), 아수륜 (阿須侖)이라고도 하는 '추악하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아수라(阿修羅)는 수미산(須彌山) 아래 거대한 바다밑에 살며 수억 만리나 되는 크기에다 수백억년이나 장수하는 귀신이다. 모습도 흉칙하기 그지없어 얼굴이 셋이고 팔이 여섯 개다. 본디 그는 착한 신(神)이었는데 후에 하늘과 싸우면서 악신(惡神)이 됐다고 한다. 싸우기를 좋아하므로 전신(戰神)으로 불리기도 한다. 그의 호전성 (好戰性)을 보여주는 예가 있다. 인도의 서사시 [마하바라타]에 보면 비슈누신의 원반(原盤)에 맞아 많은 피를 흘린 아수라(阿修羅)들이 다시 칼, 곤봉, 창으로 공격을 당해 피에 물든 그들의 시체가 마치 산처럼 겹겹이 쌓여 있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피비린내 나는 전쟁터나 처참(悽慘)한 광경을 일컬어 아수라장(阿修羅場)이라 부르는 것은 여기에서 유래되었다. 그는 정의의 상징인 하늘과 싸우기도 한다. 이 때 하늘이 이기면 풍요와 평화가, 아수라(阿修羅)가 이기면 빈곤과 재앙이 온다고 한다. 그 승패를 갈라 놓은 것은 인간들이다. 곧 인간이 선행을 해 이 세상의 정의가 널리 행해지면 하늘의 힘이 강해져 이기게 되지만 반대로 못된 짓이나 하고 불의가 만연(蔓延)해 있으면 아수라(阿修羅)의 힘이 세져 하늘이 지게 된다. 아수라(阿修羅)를 물리치는 것은 결국 인간의 노력 여하에 달려 있는 것이다. 우리 인간이 선행을 하고 정의로운 사회를 이룰 때 악의 상징인 아수라(阿修羅) 는 발을 못 붙이게 될 것이고 그렇게 되면 자연히 피비린내 나는 아수라장 (阿修羅場)도 자취를 감추게 될 것이다. 阿 언덕 아, 修 닦을 수, 羅 비단 라, 場 마당 장


15. 자포자기 自暴自棄 - 절망 상태에 빠져서, 자신을 버리고 돌보지 않음. 전국시대를 살다간 아성(亞聖) 맹자(孟子)는 '자포(自暴)'와 '자기(自棄)'에 대해 맹자(孟子) '이루편(離婁篇)'에서 이렇게 말했다. "자포(自暴:스스로를 학대)하는 사람과는 더불어 대화를 나눌 수가 없다. 자기(自棄:스스로를 버림)하는 사람과도 더불어 행동을 할 수가 없다. 입만 열면 예의 도덕(禮義道德)을 헐뜯는 것을 '자포(自暴)' 라고 한다. 한편 도덕의 가치를 인정하면서도 인(仁)이나 의(義)라는 것은 자기와는 무관 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자기(自棄)'라고 한다. 사람의 본성(本性)은 원래 선(善)한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에게 있어서 도덕의 근본 이념인 '인(仁)'은 편안한 집[安宅]과 같은 것이며, 올바른 길인 '의(義)' 는 사람에게 있어서 정로(正路:正道)이다. 편안한 집을 비운 채 들어가 살려 하지 않으며 올바른 길을 버린 채 그 길을 걸으려 하지 않는 것은 실로 개탄할 일이로다." 孟子曰 自暴者 不可與有言也 自棄者 不可與有爲也言非禮義 謂之自暴也 吾身不能居仁由義 謂之自棄也 仁 人之安宅也 義 人之正路也曠安宅而弗居 舍正路而不由 哀哉. 自 스스로 자. 暴 사나울 포. 棄 버릴 기.


16.각주구검(刻舟求劍) 刻:새길 각. 舟:배 주. 求:구할 구. 劍:칼 검. [준말]각주(刻舟),각선(脚線),각현(刻鉉) [유사어]수주대토(守株待兎) 칼을 강물에 떨어뜨리자 뱃전에 표시를 했다가 나중에 그 칼을 찾으려 한다는 뜻으로, 어리석어 시세에 어둡거나 완고함의 비유. 전국시대(戰國時代). 초(楚)나라의 한 젊은이가 양자강(揚子江)을 건너기 위해 배를 탔다. 배가 강 한복판에 이르렀을 때 그만 실수하여 손에 들고 있던 칼을 강물에 떨어뜨리고 말았다. `아뿔싸 이를 어쩐다?` 젊은이는 허둥지둥 허리춤에서 단검을 빼 들고 칼을 떨어뜨린 그 뱃전에다 표시를 했다. 이윽고 배가 나루터에 닿자 그는 곧 옷을 벗어 던지고 표시를 한 뱃전 밑의 강물 속으로 뛰어들었다.그러나 칼이 그 밑에 있을 리가 없었다.


17.간담상조(肝膽相照) 肝:간 간, 膽:쓸개 담, 相:서로 상, 照:비칠 조 (유사어) 피간담(披肝膽).(출전) 한유(韓愈)의 <柳子厚墓誌銘> 서로 간과 쓸개를 꺼내 보인다는 뜻. 곧 ① 상호간에 진심을 터놓고 격의 없이 사귐. ② 마음이 잘 맞는 절친한 사이. 당송팔대가(唐宋八大家) 중 당대(唐代)의 두 명문(名文) 대가에 한유[韓愈: 자는 퇴지(退之), 768∼824]이 있었다. 이들은 함께 고문 부흥(古文復興) 운동을 제창한 문우로서 세인으로부터 한유(韓柳)라 불릴 정도로 절친한 사이였다. 당나라 11대 황제인 헌종(憲宗:805-820) 때 유주 자사(柳州刺史)로 좌천되었던 유종원이 죽자 한유는 그 묘지명(墓地銘)을 썼다. 자신의 불우한 처지는 제쳐놓고 오히려 연로한 어머니를 두고 변경인 파주 자사(播州刺史)로 좌천, 부임하는 친구 유몽득(劉夢得)을 크게 동정했던 유종원의 진정한 우정을 찬양하고, 이어 경박한 사귐을 증오하며 이렇게 쓰고 있다. `..... 사람이란 곤경에 처했을 때라야 비로소 절의(節義)가 나타나는 법이다. 평소 평온하게 살아갈 때는 서로 그리워하고 기뻐하며 때로는 놀이나 술자리를 마련하여 부르곤 한다. 또 흰소리를 치기도 하고 지나친 우스갯소리도 하지만 서로 양보하고 손을 맞잡기도 한다. 어디 그뿐인가. `서로 간과 쓸개를 꺼내 보이며(肝膽相照)` 해를 가리켜 눈물짓고 살든 죽든 서로 배신하지 말자고 맹세한다. 말은 제법 그럴듯하지만 일단 털 끌만큼이라도 이해 관계가 생기는 날에는 눈을 부릅뜨고 언제 봤냐는 듯 안면을 바꾼다. 더욱이 함정에 빠져도 손을 뻗쳐 구해 주기는커녕 오히려 더 깊이 빠뜨리고 위에서 돌까지 던지는 인간이 이 세상 곳곳에 널려 있는 것이다.`


18.가정맹어호(苛政猛於虎) 가혹한 정치는 호랑이보다 무섭다.n가혹한 정치는 호랑이보다 더 사납다는 뜻으로, 가혹한 정치는 백성들에게 있어 호랑이에게 잡혀 먹히는 고통보다 더 무섭다는 말.n춘추 시대(春秋時代) 말엽, 공자(孔子:B.C 551 479)의 고국인 노(魯)나라에서는 조정의 실세(實勢)인 대부(大夫) 계손자(季孫子)의 가렴 주구(苛斂誅求)로 백성들이 몹시 시달리고 있었다.n어느 날, 공자가 수레를 타고 제자들과 태산(泰山) 기슭을 지나가고 있을 때 부인의 애절한 울음소리가 들려 왔다. 일행이 발길을 멈추고 살펴보니 길가의 풀숲에 무덤 셋이 보였고, 부인은 그 앞에서 울고 있었다. 자비심이 많은 공자는 제자인 자로(子路)에게 그 연유를 알아보라고 했다. 자로가 부인에게 다가가서 물었다.n"부인, 어인 일로 그렇듯 슬피 우십니까?"n부인은 깜짝 놀라 고개를 들더니 이윽고 이렇게 대답했다.n"여기는 아주 무서운 곳이랍니다. 수년 전에 저희 시아버님이 호환(虎患)을 당하시더니 작년에는 남편이, 그리고 이번에는 자식까지 호랑이한테 잡아 먹혔답니다."n"그러면, 왜 이곳을 떠나지 않으십니까?"n"하지만, 여기서 살면 세금을 혹독하게 징수 당하거나 못된 벼슬아치에게 재물을 빼앗기는 일은 없지요."n자로에게 이 말을 전해들은 공자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했다.n"잘 들 기억해 두어라. '가혹한 정치는 호랑이보다 더 무섭다[苛政猛於虎]'는 것을…‥."


19.함흥차사(咸興差使) 咸 : 다 함. 興 : 일어날 흥, 差 : 어긋날 차, 使 : 사신 사. [출전] : 연려실기술 권2. 함흥은 지명, 함흥에 갔던 어긋난 사신이란뜻으로 한 번 간 사람이 돌아오지 않거나 소식이 없음. 이성계는 새로운 왕조를 창건하여 태조가 된 인물이나 정신적인 고통도 많이 받았다. 그 중에서 가장 두드러진 것은 자식들이 서로 죽이는 불상사가 연달아 일어난 일(왕자의 난)이며, 그 장본인은 방원이었다. 태조는 세상에 뜻을 잃어 왕위를 물려주고 함흥에 가 있었다. 3대 임금이 된 방원 즉 태종은 자주 사신을 함흥으로 보내어 부자간의 불화를 풀고자 하였으나 태조는 사신으로 오는 자를 모조리 죽이거나 또는 가두었다. 그리하여 심부름을 가서 소식이 없거나 회답이 더디 올 때에 쓰는 말이다. 20.함안차사 (咸安差使) --확실한 연대와 인물은 알 수 없으나 고려 말기의 일인 듯 짐작된다.그 당시 한 사람이 대역죄를 지었는데 조정에서 안핵사까지 내려 보내 죄를 다스리게 하였다. 이 죄인에게는 노아라는 딸이 하나 있었는데 천하 절색일뿐만 아니라 가무며 학문이 능하고 구변이 청산유수이어서 한번 본 남자는 그녀의 치마폭에 놀아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노아는 효성이 지극하여 부친의 생명을 구하고자 스스로 기적에 입적하여 관리들을 홀려 그들의 약점을 이용, 아버지를 벌주지 못하게 하였다. 안핵사로 내려올 때마다 지방 관리들로 하여금 어떠한 핑계로든 잔치를 베풀게 하였고 그 자리에는 반드시 그녀가 참석하여 미색과 가무, 그리고 모든 아양을 떨어 그때마다 수청을 자청하여 안핵사로 하여금 본분의 일을 잊고 주색에 빠지게 하여 차일피일 하다가 돌아가거나 봉고 파직케 하였다.그리하여 조정에서는 최후의 수단으로 성품이 강직, 청렴하고 과단성이 있는 젊은 관원을 뽑아 안핵사의 임명하여 그 죄상을 낱낱이 밝히도록 하였다.이에 신임 안핵사는 호언장담하기를"이제 기생을 가까이 아니하고 술을 멀리하여 관리들을 희롱한 노아부터 처벌한 다음 그의 아비를 다스릴 것이다."라며 안핵길에 올랐다. 한편 노아는 밀정을 풀어 신임 안핵사의 일거일동을 손바닥 보듯 훤히 알고는 계획을 마련, 안핵사가 칠원현 웃개나루에 당도하여 객주집에 들러 점심을 들게 하였다.노아는 계획이 적중함을 기뻐하며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지점에서 소복단장으로 구경꾼 속에 끼어 들랑 달랑 하며 안핵사의 시선을 끌기에 노력하였다.안핵사의 낯선 고장의 산천경개와 굽이쳐 흐르는 낙동강을 바라보며 노독을 풀던 중 무심코 구경꾼들을 쳐다보니 멀게 가깝게 아른거리는 한 여인을 발견하였는데, 천상의 선녀가 하계하여 노니는 듯, 백학이 알을 품고 구름 속에서 춤을 추듯, 벌 나비가 꽃밭에서 춘광을 희롱하듯 하여 정신이 아득하고 눈앞이 삼삼하여 황홀경에서 벗어날 줄을 몰랐다. 이곳은 타고을이라 잠시 방심한 그는 몸이 불편하다는 핑계로 하룻밤 유숙하기를 명하고 주인을 불러 넌즈시 소복여인에 대해 물었다. 주인은 한숨만 쉬면서 말이 없더니 '그 아이는 누구의 딸이 온데 박복하게도 얼마 전 남편과 사별하고 시가에서도 의탁할 길이 없어 잠시 소인에게 돌아와 있는 중이옵니다.'하였다. 안핵사는 속으로 '옳다 구나!'하며 무릎을 치고는 슬그머니 주인의 손에 동전을 쥐어주며 오늘밤 상면케 해줄 것을 청했다. 주인은 딱 잡아떼며 말하기를"여식은 비록 비천한 소인의 소생이 오나 내칙제서(內則諸書:여자의 행실과 법도를 적은 책)며 일반 학문을 익혀 정절을 소중히 하고 있사오니 천부당 만부당 한 줄로 아옵니다."하였다. 더욱 초조하고 마음이 들뜬 그는 애원조로 거듭해서 간청하자 못이기는 체하는 말이 "하룻밤에 만리장성을 쌓는다 하였으니 부디 버리지 않는다는 약조만 하신다면 한 번 권하여 보겠나이다."하니 그는 그러마고 거듭 다짐하며 멋모르고 좋아했다. 일이 계획대로 척척 진행되니 능청스런 노구와 간교한 노아는 기뻐 어쩔 줄 몰라했는데 이윽고 해가 지고 밤이 이슥하자 주안상을 곁들여 안핵사의 방을 찾아 들었다.낮에는 먼 발치로 어름어름 보았으나 곱게 단장하여 촛불 앞에 앉은 노아를 본 순간 빼어난 절색에 그만 정신이 날아갈 것 같았으며, 무상한 인생과 덧없는 세월로 늦게 만난 것을 탄식하였다.그럭그럭 회포를 풀고 동침을 권하자 노아는 안색마저 변하며 일언지하에 거절하였다. 그럴수록 애간장이 탄 그는 섬섬옥수를 부여잡고 간청하니 대장부의 체면이 말이 아니었다. 그러자 노아는 이제는 되었겠지 생각하고 마지 못하는 척하며 응하면서 다시는 버리지 않겠다는 자문을 받은 후에 원앙금침 속에 들었다.함안에 도착한 안핵사는 왕법을 문란케 한 요녀 노아를 대령시켜 극형에 처하라고 추상같은 명령을 내렸다. 동헌 앞뜰에 끌려 온 노아는"능지처참의 죄를 범하였다 할지라도 마땅히 공사(供辭;변명서)를 보시고 결정함이 국법이온데 무조건 벌 주심은 과한 줄 아옵니다. 엎드려 바라옵건대 공사를 먼저 보시업소서!"하니 안핵사가 그 말을 옳게 여겨 공사를 보니 아비의 사연을 먼저 쓰고 끝에 시 한 구절을 적었다. 노아옥비 시수명 (盧兒玉臂 是誰名) - 노아의 옥같은 팔에 그 누구의 이름인고, 각입기부 자자명 (刻入肌膚 字字明) - 살갗에 깊이 새겨 자자히 완연하다. 영견낙동 강수진 (寧見洛東 江水盡) - 차라리 낙동강 물의 마름을 볼 지언정 첩심종불 부초맹 (妾心終不 負初盟) - 이몸이 맺은 맹서 변할 줄이 있으랴. 안핵사는 깜짝 놀라 바라보니 지난 밤에 만나 백년 천년을 같이 하자던 그녀가 아닌가? 비로소 그녀의 간계에 속은 것을 알았으나 엎질러진 물이었다. 안핵사는 갑자기 병을 빙자하여 치죄를 중지하고 영원히 관직에서 물러 났다고 한다. 그리하여 강원도 포수나 함흥차사와 같이 한 번 가면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하여 함안차사란 말이 생겨났다고 한다.


20.일망타진(一網打盡) 一:한 일. 網:그물 망. 打:칠 타. 盡:다할 진. [준말] 망타(網打). [출전]《宋史》〈人宗紀〉,《東軒筆錄》 한 번 그물을 쳐서 물고기를 다 잡는다는 뜻. 곧 범인들이나 어떤 무리를 한꺼번에 모조리 잡는다는 말. 북송(北宋) 4대 황제인 인종(仁宗) 때의 일이다. 당시 북방에는 거란[契丹:요(遼)]이 세력을 확장하고 있었고, 남쪽에서는 중국의 일부였던 안남(安南)이 독립을 선언하는 등 정세가 불리하게 돌아가는데도 인종은 연약 외교로 일관했다. 그러나 내치(內治)에는 괄목할 만한 치적이 적지 않았다. 전한(前漢) 5대 황제인 문제(文帝)와 더불어 어진 임금으로 이름난 인종은 백성을 사랑하고 학문을 장려했다. 그리고 인재를 널리 등용하여 문치(文治)를 폄으로써 이른바 '경력(慶曆:인종의 연호)의 치'로 불리는 군주 정치의 모범적 성세(聖世)를 이룩했다. 이 때의 역사적인 명신으로는 한기(韓琦) 범중엄(范仲淹) 구양수(歐陽脩) 사마광(司馬光) 주돈이(周敦 ) 장재(張載) 정호(程顥) 정이(程 ) 등이 있었는데, 이들이 조의(朝議)를 같이하다 보니 명론탁설(名論卓說)이 백출(百出)했고 따라서 충돌도 잦았다. 결국 조신(朝臣)이 양 당으로 나뉘어 교대로 정권을 잡게 되자 20년간에 내각이 17회나 바뀌었는데, 후세의 역사가는 이 단명 내각의 시대를 가리켜 '경력의 당의(黨議)'라 일컫고 있다. 이 무렵, 청렴 강직하기로 이름난 두연(杜衍)이 재상이 되었다. 당시의 관행으로는 황제가 상신(相臣)들과 상의하지 않고 독단으로 조서를 내리는 일이 있었는데, 이것을 내강(內降)이라 했다. 그러나 두연은 이 같은 관행은 올바른 정도(政道)를 어지럽히는 것이라하여 내강이 있어도 이를 묵살, 보류했다가 10여 통쯤 쌓이면 그대로 황제에게 돌려보태곤 했다. 이러한 두연의 소행은 성지(聖旨)를 함부로 굽히는 짓이라하여 조야로부터 비난의 대상이 되었다. 이런 때 공교롭게도 관직에 있는 두연의 사위인 소순흠(蘇舜欽)이 공금을 유용하는 부정을 저질렀다. 그러자 평소 두연에 대한 감정이 좋지 않은 어사(御史:검찰총장) 왕공진(王拱辰)은 쾌재를 부르고 소순흠을 엄히 문초했다. 그리고 그와 가까이 지내는 사람들을 모두 공범으로 몰아 잡아 가둔 뒤 재상 두연에게 이렇게 모고했다. "범인들을 일망타진(一網打盡)했습나다." 이 사건으로 말미암아 그 유명한 두연도 재임 70일 만에 재상직에서 물러나고 말았다


21.천고마비(天高馬肥) 天:하늘 천. 高:?을 고. 馬:말 마. 肥:살찔 비. [원말] 추고마비(秋高馬肥). [동의어] 추고새마비(秋高塞馬肥). [유사어] 천고기청(天高氣淸). [출전]《漢書》〈匈奴專〉 하늘이 높고 말이 살찐다는 뜻. 곧 ① 하늘이 맑고 오곡 백과(五穀百果)가 무르익는 가을을 형용하는 말. ② (흉노에게 있어, 전하여 오늘날에는 누구에게나) 활약(동)하기 좋은 계절을 이르는 말. 은(殷)나라 초기에 중국 북방에서 일어난 흉노는 주(周) 진(秦) 한(漢)의 삼왕조(三王朝)를 거쳐 육조(六朝)에 이르는 근 2000년 동안 북방 변경의 농경 지대를 끊임없이 침범 약탈해 온 표한(剽悍)한 유목 민족이었다. 그래서 고대 중국의 군주들은 흉노의 침입을 막기 위해 늘 고심했는데 전국시대에는 연(燕) 조(趙) 진(秦)나라의 북방 변경에 성벽을 쌓았고, 천하를 통일한 진시황(秦始皇)은 기존의 성벽을 수축(修築)하는 한편, 증축 연결(增築連結)하여 만리장성(萬里長城)을 완성하기도 했다. 그러나 흉노의 침입은 끊이지 않았다. 북방의 초원에서 방목과 수렵으로 살아가는 흉노에게 우선 초원이 얼어붙는 긴 겨울을 살아야 할 양식이 필요했기 때문이다.그래서 북방 변경의 중국인들은 '하늘이 높고 말이 살지는[天高馬肥]' 가을만 되면 언제 흉노가 쳐들어올지 몰라 전전긍긍(戰戰兢兢)했다고 한다.

 

22.螢窓雪案(형창설안)-螢雪之功(형설지공) 螢:반딧불 형, 雪:눈 설, 之:어조사 지, 功:공 공. [원말]螢窓雪案(형창설안), 낭형조서(囊螢照書) [출전]《 晉書》<車胤·孫康傳>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열심히 공부함 中國 역사상 12열국 중 하나인 東晋(동진)은 귀족 문화가 어느 나라 보다도 개화한 나라였다. 詩에서는 유명한 도잠(陶潛-陶淵明), 繪畵(회화)에는 고개지(顧愷之), 書에는 왕희지(王羲之) 등이 활약하여 훌륭한 문화 업적을 남긴 나라이다. 이 東晋에 차윤(車胤)이라는 선비가 있었다. 字(자)가 武子(무자)라 했는데, 그는 어려서부터 태도가 공손하고 부지런하여 온갖 책을 많이 읽었다. 그러나 집안이 가난하여 독서할 때 밝힐 등불의 기름을 구하지 못하는 형편이었다. 그래서 車胤은 여름이 되면 깨끗한 비단 주머니를 만들어 그 속에다 수십 마리의 개똥 벌레(螢)를 잡아 넣고 밤이 되면 이것으로 책을 비추어 가며 읽기를 계속했다 그리하여 螢窓(형창)이란 말이 나왔으며, 그 결과 후에 벼슬이 尙書郞(상서랑:皇帝의 측근에서 조서를 맡음)에 이르렀다. 또 같은 시대에 손강(孫康)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젊어서부터 性情(성정)이 말고 깨끗하여 세상 사람들과 어울림에 잡스런 데가 없었다. 그러나 집안 형편이 어려워 등불을 밝힐 기름이 없었다. 할 수 없이 겨울이면 눈(雪)에 비추어서 책을 부지런히 읽었다. 그 결과 뒤에 벼슬이 御史大夫(어사대부:대사헌)에 이르렀다. 현재 책상을 雪案(설안)이라 함은 여기에서 유래한다.


23.백리부미(百里負米) 일백 백/ 이수 리/ 질 부/ 쌀 미. [동의어] 자로부미(子路負米) [출전] 공자가어(孔子家語) “치사(致思)” 이수(里數) : 거리를 里의 단위로 센 수 백리나 떨어진 먼 곳으로 쌀을 진다는 말로, 가난하게 살면서도 효성이 지극하여 갖은 고생을 하며 부모의 봉양을 잘하는 것을 뜻한다.


24.빈자일등(貧者一燈) 貧:가난할 빈, 者:놈 자, 一:한 일, 燈:등불 등. [출전]《賢愚經(현우경)》 가난한 사람이 밝힌 등불. 가난하더라도 정성을 다해 부처님에게 바친 등불 하나가 부귀한 사람들이 바친 만개의 등불보다 공덕이 크다는 것으로 많은 보시(布施)보다도 참다운 마음과 정성이 소중하다 석가모니가 사위국(舍衛國)의 어느 정사(精舍)에 머무르고 있을 때의 일이다. 이 나라에 난타(難陀)라는 여자가 있었는데 너무나 가난해서 구걸을 하며 살았다. 각기 자기 분수에 맞게 석가모니에게 공양하는 것을 보고 스스로 한탄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나는 전생에 저지른 죄 때문에 가난하고 천한 몸으로 태어나 아무 공양을 할 수가 없구나" 난타는 어떻게 해서든 공양하는 시늉이라도 하겠다면서 하루종일 돌아다니며 구걸을 한 끝에 겨우 돈 한 푼을 손에 넣게 되었다. 모처럼 밝은 표정이 되어 기름집으로 가는 난타의 발걸음은 가벼웠다. 기름을 사서 등불을 만들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기름집 주인은"겨우 한 푼어치 기름을 사다가 어디에 쓴단 말이지. 한 푼어치는 팔지도 않거니와 판다고 해도 조금 밖에 쓰지 못하는 눈곱만한 양이야" 하면서 기름팔기를 거절했다. 난타는 자기의 간절한 심정을 주인에게 털어놓고 다시 한번 사정했다. 주인은 난타의 정성에 감동하여 돈 한푼을 받고 꽤 많은 기름을 주었다. 난타는 크게 기뻐하며 등 하나에 불을 붙여 정사로 가서 석가에게 바치고 불단 앞에 많은 등불 속에 놓아두었다. 난타의 등불은 한밤중 내내 밝게 빛났고 먼동이 틀 때까지 홀로 타고 있었다. 손을 휘저어도, 옷을 흔들어 바람을 보내도 그 등불은 꺼지지 않았다. 뒤에 석가가 난타의 정성을 알고 그녀를 비구니로 받아들였다고 한다. ※精舍:중이 불도를 닦는 곳 춘추시대(春秋時代) 공자(孔子)의 제자 자로(子路)는 효성이 지극하기로 이름이 나 있었다. 하루는 자로가 공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무거운 물건을 지고 먼 곳으로 갈 때에는 땅의 좋고 나쁨을 가리지 않고 쉬게 되고, 집이 가난하여 부모님을 모실 때에는 봉록의 많고 적음을 가리지 않고 관리가 됩니다. 옛날 제가 두 부모님을 섬길때는 항상 명아주잎과 콩잎과 같은 나쁜 음식을 대접하여, 직접 쌀을 백 리 밖에서 져 오게 되었습니다. 부모님이 돌아가신 후, 남쪽의 초(楚)나라에서 관리가 되었을 때는 수레는 백 대나 되었고, 창고에 쌓아 놓은 쌀이 만 종(鍾;1종은 6석 2두)이나 되었으며, 깔개를 포개 놓고 앉아 솥을 늘어놓고 먹었는데, 명아주잎과 콩잎을 먹고 직접 쌀을 지고 가기를 원했지만 할 수 없었습니다. 마른 물고기를 묶어 놓은 것이 어찌하여 썩지 않겠습니까? 두 양친의 수명은 흰 말이 달려 지나가는 것을 문틈으로 보는 것처럼 순간일 뿐입니다.” 공자가 감탄하며 말했다.“자로가 부모님을 섬기는 것은 살아 계실 때는 힘을 다해 섬기고 죽은 후에는 그리움을 다하는구나.”


25.예미도중(曳尾塗中) 끌예, 꼬리미, 길도, 가운데중 [출전] 장자(莊子) 추수편(秋水篇) 꼬리를 진흙속에 끌고 다닌다는 뜻으로 부귀를 누리면서 구속된 생활을 하는 것보다는 비록 가난하더라도 자유로운 생활을 누리는 것이 낫다는 말의 비유. 초(楚)나라 왕이 어느 날 사람을 보내어 낚시를 즐기고 있는 장자를 청하였다. 그러나 장자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다음과 같이 물었다. "초나라에는 3천년 묵은 죽은 거북을 계단으로 싼 상자 안에 넣어 묘당(廟堂)에 소중히 보관하고 있다고 듣고 있소. 거북이의 생전에 자신이 그렇게 죽어서 소중히 간직되길 바라겠소? 아니면 살아 꼬리를 진흙 속에 넣고 끌고 다니기를 바라겠소(曳尾塗中)?" "물론 진흙 속에 꼬리를 넣고 끌고 다니길 바랐겠지요." 이렇게 대신이 대답하자 장자는 말했다. "그렇다면 이제 얘기가 된 것 같소. 나 역시 진흙 속에 꼬리를 넣고 다니는 길을 택하겠소."


26.조강지처(糟糠之妻) 糟:술재강 조. 糠:겨 강. 之:갈 지(…의). 妻:아내 처. [원말] 조강지처 불하당(糟糠之妻不下堂). [출전]《後漢書》〈宋弘專〉 술재강과 겨로 끼니를 이을 만큼 구차할 때 함께 고생하던 아내. 전한(前漢)을 찬탈한 왕망(王莽)을 멸하고 유씨(劉氏) 천하를 재흥한 후한(後漢) 광무제(光武帝) 때의 일이다. 건원(建元) 2년(26), 당시 감찰(監察)을 맡아보던 대사공(大司空:御史大夫) 송홍(宋弘)은 온후한 사람이었으나 간할 정도로 강직한 인물이기도 했다. 어느 날, 광무제는 미망인이 된 누나인 호양공주(湖陽公主)를 불러 신하 중 누구를 마음에 두고 있는지 그 의중을 떠보았다. 그 결과 호양 공주는 당당한 풍채와 덕성을 지닌 송홍에게 호감을 갖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 후 광무제는 호양공주를 병풍 뒤에 앉혀 놓고 송홍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던 끝에 이런 질문을 했다. "흔히들 고귀해지면 (천할 때의) 친구를 바꾸고, 부유해지면 (가난할 때의) 아내를 버린다고 하던데 인지상정(人之常情) 아니겠소?" 그러자 송홍은 이렇게 대답했다. "폐하, 황공하오나 신은 '가난하고 천할 때의 친구는 잊지 말아야 하며[貧賤之交 不可忘], 술재강과 겨로 끼니를 이을 만큼 구차할 때 함께 고생하던 아내는 버리지 말아야 한다[糟糠之妻 不下堂]'고 들었사온데 이것은 사람의 도리라고 생각되나이다." 이 말을 들은 광무제와 호양 공주는 크게 실망했다고 한다.


27.거자불추 내자불거(去者不追 來者不拒) 갈거, 것자, 아니불, 좇을추, 올래, 것자, 아니불, 막을거 [출전] 맹자(孟子) 가는 사람 붙들지 말고 오는 사람은 물리치지도 않는다는 뜻. 맹자(孟子)가 등(藤)나라의 상궁(上宮)에 거하고 있을 때였다. 맹자는 가는 곳마다 대단한 환영을 받았으며 또 그의 가르침을 받고자 많은 사람들이 맹자를 찾아왔다. 그런데 맹자가 거하는 여관의 일꾼이 미투리를 삼다가 창틀 위에 올려놓고 맹자 일행이 방을 차지하여 들어가고 그의 가르침을 받고자 한 사람들도 다 돌아간 다음 다시 신을 삼고자 창가로 가보았으나 신이 보이지 않았다. 그 사람은 누군가가 그 신을 훔쳐갔다고 생각하고 막 떠들어 대었으며 다른 사람들도 그렇게 생각하고 그 중 한명이 맹자에게 항의를 하였다. 이 말을 듣고 맹자는, "나를 따라온 사람이 그 신을 훔치기 위해 왔단 말인가?" 라고 묻자 그는 대답했다. "아닙니다. 선생님께서 사람을 대하는 것은 가는 사람을 붙들지도 않고 오는 사람을 물리치지도 않으며(去者不追 來者不拒) 배우고자 하는 마음을 가진 자는 받을 뿐입니다."


28.교학상장(敎學相長) 가르칠교, 배울학, 서로상, 길장 [출전] 예기(禮記) 학기(學記)편 가르치고 배우면서 서로 성장한다는 뜻이다. 즉 스승과 제자는 한쪽은 가르치기만 하고 다른 한쪽은 배우기만 하는 상하 관계가 아니라 스승은 학생에게 가르침으로써 성장하고, 제자 역시 배움으로써 나아진다는 것이다. 중국에서 '예'의 본질과 의미에 대해 상세하게 기록한 책이 <예기(禮記)>인데, 그 책의 "학기(學記)"편에 이런 내용이 있다. "좋은 안주가 있다고 하더라도 먹어 보아야만 그 맛을 알 수 있다. 또한 지극한 진리가 있다고 해도 배우지 않으면 그것이 왜 좋은지 알지 못한다. 따라서 배워 본 이후에 자기의 부족함을 아 수 있으며, 가르친 이후에야 비로소 어려움을 알게 된다...... 그러기에 가르치고 배우면서 성장한다고 하는 것이다." 활용의 예 - 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인다는 말이 있다. 이 말은 배움이 깊을 수록 겸허해진다는 뜻으로 해석해도 좋을 것이다. 학문이 아무리 깊다고 해도 가르쳐 보면, 자신이 미처 알지 못하는 부분이 적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스승은 부족한 곳을 더 공부하여 제자에게 익히게 하며 제자는 스승의 가르침을 받아 훌륭한 인재로 성장한다. 공자는 일찍이 '후생가외(後生可畏)'라는 말을 했다. 즉 나중에 태어난 사람은 두려워할 만하다는 의미이다. 그만큼 젊은 사람들의 가능성은 무궁 무진하다는 의미이다. 가르치는 사람이나 배우는 사람이나 모두 '교학상장'의 자세로 임하면 흔들리고 있는 '사제지도'가 새롭게 부활될 수 있을 것이다.


29.蹊田奪牛(혜전탈우)◈ 蹊:지름길 혜, 田:밭 전, 奪:빼앗을 탈, 牛:소 우. [출전]《史記》 남의 소가 내 밭을 짓밟았다고 그 소를 빼앗다. 가벼운 죄에 대한 처벌이 혹독하다는 뜻 춘추시대 陳(진)나라의 대부 夏徵舒(하징서)가 자기 집에 놀러와 술을 마시고 돌아가는 임금 靈公(영공)을 弑害(시해)했다. 이 소식을 들은 楚(초)나라 莊王(장왕)이 군사를 일으켜 진나라의 수도를 공략하고 하징서를 죽임으로써 세상 사람들의 박수를 받았다. 장왕은 내친 김에 진나라를 초나라의 한 고을로 만들어 버렸다. 이렇게 장왕이 우쭐해 있을 때 齊(제)나라에 사신으로 가있던 대부 申叔時(신숙시)가 돌아왔다. 그가 장왕에게 업무 보고만 하고는 그대로 물러나려고 하자 장왕은 불쾌한 표정으로 불러 세우고는 말했다. "하징서가 무도하게도 그 임금을 시해했기 때문에 과인이 쳐들어가 그를 죽였다. 諸侯(제후)와 縣公(현공)들이 모두 축하해주는데 그대만 아무 말이 없으니 무슨 까닭인가?" 신숙시의 대답은 이랬다. "임금을 시해한 죄는 물론 크지요. 그를 처단하신 전하의 의리는 대단합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의 소가 내 밭을 짓밟았다고 해서 그 소를 빼앗을 수는 없습니다. 남의 소가 무단히 내 밭을 짓밟았다면 잘못된 일이지요. 그렇다고 남의 소를 빼앗는다면 지나친 처벌이 되지 않겠습니까. 제후들이 전하를 칭송하는 것은 죄지은 자를 징벌했기 때문입니다. 진나라를 이 나라의 한 고을로 만든 것은 남의 富(부)를 탐낸 것입니다. 죄 있는 자를 징벌하면서 남의 땅까지 탐낸다면 이게 옳은 일이 되겠습니까?" 장왕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맞는 말이야. 과인의 생각이 미치지 못했었군. 지금이라도 돌려주면 되지 않겠는가." 그 신하에 그 임금. 장왕은 빼앗은 진나라를 즉각 원상 회복시켜 주었다.


30.귀이천목(貴耳賤目) 귀할귀, 귀이, 천할천, 눈목. [출전] 환자신론 글자 그대로 귀를 귀하게 여기고 눈을 천하게 여긴다는 뜻으로, 가까운 것을 나쁘게 여기고 먼 곳에 있는 것을 괜찮게 여기는 보통 사람들의 풍조를 가리킨다.본래 이 말은 복고주의적 성향이 강한 중국인들에게 널리 알려진 것으로, 천금'과 같은 말로 쓰인다 <환자신론>에 이런 내용이 있다. "세상 사람들은 옛 것을 귀하게 여기고, 지금 것을 비천하게 여긴다. 또 먼 곳의 소문은 귀하게 여기고, 가까운 데서 제 눈으로 본 것을 천한 것으로 여긴다." 활용의 예 - 이것은 분별 있는 사고에 의해 올바른 것을 파악하기보다는 현재를 부정하고, 옛 것만 좇는 세태를 꼬집은 것이다. 요즈음 우리 나라 일부 신세대의 의식 구조를 보면, 서구 문물의 영향 때문인지 국적이 없을 정도로 심각한 경향이 있다. 무조건 서구 것은 좋고 우리 것은 별다른 것이 없다는 식의 자기 부정의 논리는 단순히 우리 전통 문화를 업신여기는 풍조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사고마저도 그릇된 방향으로 나아가게 만든다는 점을 알아야 한다.


31.순망치한(脣亡齒寒) 脣:입술 순. 亡:망할 잃을 망. 齒:이 치. 寒:찰 한. [대응어] 보거상의(輔車相依)∼. [동의어] 순치지국(脣齒之國), 순치보거(脣齒輔車). [유사어] 조지양익(鳥之兩翼), 거지양륜(車之兩輪). [출전]《春秋左氏專》〈僖公五年條〉 입술을 잃으면 이가 시리다는 뜻. 곧 ① 이웃 나라가 가까운 사이의 한쪽이 망하면 다른 한쪽도 온전하기 어려움의 비유. ② 서로 도우며 떨어질 수 없는 밀접한 관계, 또는 서로 도움으로써 성립되는 관계의 비유. 춘추 시대 말엽(B.C. 655), 오패(五 )의 한 사람인 진(晉)나라 문공(文公)의 아버지 헌공(獻公)이 괵(?) 우(虞) 두 나라를 공략 할 때의 일이다. 괵나라를 치기로 결심한 헌공은 통과국인 우나라의 우공(虞公)에게 길을 빌려주면 많은 재보(財寶)를 주겠다고 제의했다. 우공이 이 제의를 수락하려 하자 중신 궁지기(宮之奇)가 극구 간했다. "전하, 괵나라와 우나라는 한 몸이나 다름없는 사이오라 괵나라가 망하면 우나라도 망할 것이옵니다. 옛 속담에도 덧방 나무와 수레는 서로 의지하고[輔車相依], '입술이 없어지면 이가 시리다[脣亡齒寒]'란 말이 있사온데, 이는 곧 괵나라와 우나라를 두고 한 말이라고 생각되옵니다. 그런 가까운 사이인 괵나라를 치려는 진나라에 길을 빌려준다는 것은 언어도단(言語道斷)이옵니다." "경은 진나라를 오해하고 있는 것 같소. 진나라와 우나라는 모두 주황실(周皇室)에서 갈라져 나온 동종(同宗)의 나라가 아니오? 그러니 해를 줄 리가 있겠소?" "괵나라 역시 동종이옵니다. 하오나 진나라는 동종의 정리를 잃은지 오래이옵니다. 예컨대 지난날 진나라는 종친(宗親)인 제(齊)나라 환공(桓公)과 초(楚)나라 장공(莊公)의 겨레붙이까지 죽인 일도 있지 않사옵니까? 전하, 그런 무도한 진나라를 믿어선 아니 되옵니다." 그러나 재보에 눈이 먼 우공은 결국 진나라에 길을 내주고 말았다. 그러자 궁지기는 화가 미칠 것을 두려워하여 일가권속(一家眷屬)을 이끌고 우나라를 떠났다. 그 해 12월, 괵나라를 멸하고 돌아가던 진나라 군사는 궁지기의 예언대로 단숨에 우나라를 공략하고 우공을 포로로 잡아갔다.


32. 인금구망(人琴俱亡) 人(사람 인) 琴(거문고 금) 俱(함께 구) 亡(죽을 망) [출전]세설신어(世說新語) [유사어]인금병절(人琴幷絶) 가까운 이들의 죽음에 대한 애도(哀悼)의 정(情)]을 비유한 말 세설신어(世說新語) 상서(傷逝)편에는 죽음에 대한 애상(哀傷)을 이야기들이 실려 있다. 동진(東晋)의 유명한 서예가인 왕희지(王羲之)의 다섯째 아들 왕휘지(王徽之:字는 子猷)와 일곱째 아들 왕헌지(王獻之:字는 子敬) 형제가 모두 병에 걸렸는데, 동생인 자경이 먼저 세상을 떠났다. 형 자요는 곁에 있는 사람들에게 [어찌 자경의 소식은 없는 것입니까? 그 얘가 이미 죽은 게 아닙니까?]라고 물으면서 조금도 슬퍼하거나 울지는 않았다. 형 자요는 즉시 수레를 타고 동생의 빈소로 달려가서는 동생의 관(棺) 위에 올라가 동생이 평소에 좋아하였던 거문고를 꺼내들고 타보았다. 그러나 거문고가 소리를 내지 않자, 자요는 이를 내던지며 [자경아, 자경아, 너와 거문고가 함께 죽었구나(子敬, 子敬, 人琴俱亡)]하면서 한참동안이나 애통하였다. 한 달쯤 지나 형 자요도 그만 세상을 떠났다. [人琴俱亡]은 [인금병절(人琴幷絶)]이라고도 하며, [가까운 이들의 죽음에 대한 애도(哀悼)의 정(情)]을 비유한 말이다.


33.韋編三絶(위편삼절) 가죽 위, 엮을 편, 석 삼, 끊을 절. [출전]《史記》<孔子世家> 가죽으로 맨 책끈이 세 번이나 끊어지다. 곧 독서에 힘씀 고대 중국에서의 책은 대나무를 직사각형으로 잘라(竹簡-죽간) 거기에 글씨를 쓴 여러 장을 가죽끈으로 엮어 이은 것이었다. 韋編은 그 가죽끈을 가리키고 三絶은 세번만 끊어지는 것이 아니라 여러 번 끊어진다는 뜻이다. 이 말은 《史記》의 <孔子世家>에 나온다. <공자가 만년에 易經(역경) 읽기를 좋아하여 '책을 엮은 죽간의 끈이 여러번 끊어지도록 역경을 읽었다(讀易韋編三絶)'. 그리고 말하기를 내게 몇년의 수명이 더해진다면 주역에 대해서 그 가르침을 밝혀낼 수가 있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공자는 늙어서도 책읽기를 게을리하지 않아 '역경'을 열심히 뒤지다보니 책을 묶은 가죽끈이 몇번이나 끊어졌다는 것이다. 독서를 권장하는 말에 開卷有益(개권유익)이란 것도 있다. 책은 읽지 않고 펼치기만 해도 유익하다는 뜻이다. 송(宋)나라 황제 태종은 책읽기를 좋아한 나머지 학자 이방 등에게 명하여 방대한 辭書(사서)를 편찬케 했다. 7년만에 완성된 이 사서는 모두 1천여권. 송태종 태평연간(太平年間)에 편찬되었으므로 그 연호를 따서 '太平總類'라는 이름을 붙였다. 태종은 크게 기뻐하며 매일 두세권씩 1년 동안에 다 읽어보았다고 한다. 황제가 직접 읽었다고 해서 뒷날 사람들은 이 책을 '太平御覽'(태평어람)이라고도 부른다. 정무에 바쁜 황제가 침식을 잊고 책읽기에 몰두하자 신하들이 좀 쉬어가면서 읽으라고 간했다. 그러자 태종은 이렇게 말했다. "책은 펼치기만 해도 유익하다네(開卷有益). 그렇기 때문에 나는 조금도 피로를 느끼지 않아


34.추고마비(秋高馬肥) 秋 가을추 高 높을고 馬 말마 肥 살찔비 [출전]두심언의 詩 가을 하늘이 높으니 말은 살찐다는 뜻 두심언은 친구 소미도가 중종때, 참군으로 북녘에 있을 때, 하루빨리 장안으로 돌아오기를 원하여 지은 것이다.구름은 깨끗한데 요사스런 별이 떨어지고 을 하늘이 높으니 변방의 말이 살찌는구나 말 안장에 의지하여 영웅의 칼을 움직이고 붓을 휘두르니 격문이 날아든다. 이 시는 변방의 정경과 승리를 거둔 당나라 군대의 빛나는 승전보를 전하고 있다. 이 시에서 '추고새마비(秋高馬塞肥)'라는 구절은 군대의 승리를 가을날에 비유한 것이다.따라서 '추고마비'라는 말은 아주 좋은 가을 날씨를 표현하는 말로 쓰인다. 그런데 우리 나라에서는 '천고마비(天高馬肥)'라는 말을 일반적으로 사용하고 있다.


35.일의대수(一衣帶水)一:한 일. 衣:옷 의. 帶: 띠 대. 水:물 수.[유사어] 일우명지(一牛鳴地),일우후지(一牛吼地),지호지간(指呼之間).[출전]《南史》〈陳後主紀〉한 줄기 띠와 같이 좁은 강물이나 바닷물이라는 뜻. 곧 ① 간격이 매우 좁음. ② 강이나 해협을 격한 대안(對岸)의 거리가 아주 가까움. 서진(西晉:265∼317) 말엽, 천하는 혼란에 빠져 이른바 남북조(南北朝) 시대가 되었다. 북방에서는 오호 십육국(五胡十六國)이라 일컫는 흉노(匈奴) 갈(?) 선비(鮮卑) 강(羌) 저( )등 5개 이민족이 세운 열 세 나라와 세 한족국(漢族國)이 흥망을 되풀이했고, 남방에서는 송(宋) 제(齊) 양(梁) 진(陳:557∼589) 등 네 나라가 교체되었다. 북방의 북조 최후의 왕조인 북주(北周:577∼580)를 물려받아 수(隋:581∼618)나라를 세운 문제(文帝:581∼604)는 마침내 남조 최후의 왕조인 진나라를 치기로 하고 이렇게 선언했다. "진왕(陳王)은 무도하게 백성들을 도탄에 빠뜨렸도다. 이제 짐(朕)은 백성의 어버이로서 어찌 '한 줄기 띠와 같이 좁은 강물[一衣帶水]' 따위를 겁내어 그들을 죽게 내버려 둘 수 있으랴." 양자강은 예로부터 천연의 요해(要害)로서 삼국시대의 오(吳)나라 이후 남안(南岸)의 건강(建康:南京)에 역대 남조의 도읍이 있었다.문제의 명에 따라 52만의 수나라 대군은 단숨에 양자강을 건너 진나라를 멸하고 천하를 통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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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馬脚露出(마각노출) 馬:말 마, 脚:틈각, 露:드래낼 노, 出:날출. [출전] 후한서 반초전, 南史 조경종전, 왕건전시랑귀진시. [준말] 馬脚(마각) 간사하게 숨기고 있던 일을 드러내다 馬脚의 각은 (脚:틈각)은 틈새라는 뜻이므로, 마각의 뜻은 숨기고 있는 틈(틈새)을 뜻하며 '마각을 드러내다'(마각노출)는 간사하게 숨기고 있던 일을 드러내다란 뜻이다. 다시말해 말의 다리와 말굽사이에 난 긴털이 말굽(틈)을 숨기고 있다가 부지중에 허옇게 드러낸다는 이유로 이 말이 생긴 것 같다. 마각이란 말은 후한서 반초전, 南史 조경종전, 왕건전시랑귀진시 등에 나와 있고, 남사 종경종전에서 나온 것이 지금 우리가 쓰고 있는 뜻이다.


37.오합지중(烏合之衆) 烏:까마귀 오. 合:합할 합. 之:갈 지(…의). 衆:무리 중. [동의어] 오합지졸(烏合之卒). [유사어] 와합지중(瓦合之衆). [출전]《後漢書》〈耿감專(경감전)〉 까마귀떼 같이 질서 없는 무리라는 뜻. 곧 ① 규율도 통일성도 없는 군중. ② 갑자기 모인 훈련 없는 군세(軍勢). 전한(前漢) 말, 대사마(大司馬)인 왕망(王莽)은 평제(平帝)를 시해(弑害)하고 나이 어린 영(孀)을 세워 새 황제로 삼았으나 3년 후 영을 폐하고 스스로 제위에 올라 국호를 신(新)이라 일컬었다(9년). 이처럼 천하가 혼란에 빠지자 유수(劉秀:후한의 시조)는 즉시 군사를 일으켜 왕망 일당을 주벌(誅伐)하고 경제(景帝)의 후손인 유현(劉玄)을 황제로 옹립했다. 이에 천하는 다시 한나라로 돌아갔다(23년). 대사마가 된 유수가 이듬해 성제(成帝)의 아들 유자여(劉子與)를 자처하며 황제를 참칭(僭稱)하는 왕랑(王郞)을 토벌하러 나서자 상곡(上谷) 태수 경황(耿況)은 즉시 아들인 경감(耿 )에게 군사를 주어 평소부터 흠모하던 유수의 토벌군에 합류케 했다. 그런데 유수의 본진을 향해 행군하던 경감의 군사는 손창(孫倉)과 위포(衛包)가 갑자기 행군을 거부하는 바람에 잠시 동요했다. "유자여는 한왕조(漢王朝)의 정통인 성제의 아들이라고 하오. 그런 사람을 두고 대체 어디로 간단 말이오?" 격노한 경감은 두 사람을 앞으로 끌어낸 뒤 칼을 빼 들고 말했다. "왕랑은 도둑일 뿐이다. 그런 놈이 황자(皇子)를 사칭하며 난을 일으키고 있지만, 내가 장안[長安:섬서성 서안(陝西省西安)]의 정예군과 합세해서 들이치면 그까짓 '오합지중'은 마른 나뭇가지보다 쉽게 꺾일 것이다. 지금 너희가 사리를 모르고 도둑과 한패가 됐다간 멸문지화(滅門之禍)를 면치 못하리라." 그날 밤, 그들은 왕랑에게로 도망치고 말았지만 경감은 뒤쫓지 않았다. 서둘러 유수의 토벌군에 합류한 경감은 많은 무공을 세우고, 마침내 건위대장군(建威大將軍)에 임명되었다.


38.철중쟁쟁(鐵中錚錚) 鐵 : 쇠철, 中 : 가운데중, 錚 : 쇠소리쟁 [출전]후한서 [유사어]용중교교 쇠는 좋은 것일수록 쟁쟁하고 소리가 맑게 울린다. 즉 쇠 중에서도 쟁 쟁하고 울리는 것이란 뜻으로 같은 종류 가운데 특히 뛰어난 것의 비유로 쓰이는 말이다. 후한 광무제의 통일 천하에 있어 가장 강한 적은 적미(赤眉)였다. 전한을 없애고 왕망 이 신(新)이란 나라를 새로 세웠을 당시에 일어났던 대규모의 농민 반란군으로 처음은 번숭을 수령으로 낭야에서 일어나, 뒤에 봉안. 서선. 사녹 등이 이끄는 군대까지 이에 합류되어, 산동 성을 중심으로 유분자(劉盆子)를 왕으로 받들고, 그 위세가 대단했었다. 그들은 한나라 왕실의 상징인 붉은 색으로 눈썹을 그려 표를 하고 다녔기 때문에 적미라는 이 름을 듣게 된 것이다. 적미는 한때 수도 장안으로 쳐들어와, 이미 왕망을 넘어 뜨리고 황제의 위에 올라 있던 갱시 제 유현을 쳐없애고 광무제 유수와 대결하게 되었다. 그들이 패해 광부제에게 항복을 했을 때, 번숭. 서선 등을 보고 광무제는 이렇게 말했다. "그대들은 항복한 것을 후회하지 않는가? 원한다면 다시 한번 실력으로 승부를 결정해도 좋 다. 짐은 항복을 강요하고 싶지는 않다." 그러자 그들은 머리를 조아리며, 항복을 받아주시니 그저 호랑이 입을 벗어나 사랑하는 어머니 품에 돌아온 것 같다면서 아무런 후회도 없다고 대 답했다. 이같은 대답에 광무제는 "경들이야말로 철중쟁쟁 용중교교란 것이요" 하고 칭찬을 했 다. 용중교교(傭中교교, 사람인변의 交)는 똑같은 물건 가운데 뛰어난 것이란 말로 철중쟁쟁 과 같은 뜻이다.


39.桀犬吠堯(걸견폐요) 桀 : 홰 걸, 犬 : 개 견, 吠 : 짖을 폐, 堯 : 요임금 요, [출전] 사기 개는 주인만을 알고 그 이외의 사람에게는 사정을 두지 않았다는 뜻 사기 열전 淮陰侯(회음후) 편에 보면, 괴通(괴통)이란 策士(책사)가 한신에게 이렇게 권유했다. 「지금 항우는 남쪽을 차지하고 유방은 서쪽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지금 동쪽인 제나라를 차지하고 있는 대왕이 어느 쪽에 가담하느냐에 따라 천하 대세는 좌우되고 맙니다. 한왕이 대왕을 제나라 왕으로 봉한 것은 남쪽으로 초나라 항우를 치기 위한 부득이한 조처로 실은 대왕을 속이고 몹시 꺼리고 있습니다. 항우가 망하게 되는 날 대왕의 신변은 위태롭게 됩니다. 지금 항우가 바라고 있듯이 이 기회에 천하를 셋으로 나누어 동쪽을 대왕이 차지하고 대세를 관망하는 것이 가장 현명한 길입니다.」 한신은 며칠을 두고 고민하던 끝에 결국은 괴통의 꾀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말았다. 천하가 통일되자 유방은 괴통이 말한 대로 한신을 없애려는 생각으로 꽉 차 있었다. 초나라 왕으로 봉해졌던 한신은 역적의 누명을 쓰고 장안으로 잡혀 오게 되었고, 이렇다 할 증거를 잡을 수 없자 그를 초 왕에서 회음후로 작을 깎았다. 그 뒤 정말 역적으로 몰려 여후의 손에 죽게 되자 한신은,「나는 괴통의 꾀를 듣지 않고 아녀자의 속인바가 된 것을 후회한다. 어찌 운명이 아니었는가」 하는 말을 남겼다. 한신이 남긴 말을 전해들은 한 고조 유방은 곧 괴통을 잡아들이게 했다. 「내가 회음후에게 반역하라고 시킨 일이 있느냐?」고조의 물음에 괴통은 태연히 대답했다.「그렇습니다. 신이 반역하라고 일러 주었습니다. 그 철부지가 신의 꾀를 쓰지 않았기 때문에 스스로 몸을 망치고 만 것입니다. 만일 그 철부지가 신의 계책을 썼던들 폐하께서 어떻게 그를 죽일 수 있었겠습니까?」화가 치민 고조는 괴통을 기름 가마에 삶아 죽이라는 명령을 내렸다. 「슬프고 원통하도다! 내가 삶겨 죽다니!」 괴통은 하늘이 원망스럽다는 듯이 부르짖었다. 「네가 한신을 반하라고 시켰다면서 무엇이 원통하단 말이냐?」「진나라가 그 사슴을(정권) 잃은지라 온 천하가 다 함께 이를 쫓았습니다. 그 결과 솜씨가 뛰어나고 발이 빠른 사람이 먼저 얻게 된 것입니다. 도척같은 도둑놈의 개도 요임금을 보면 짖습니다. 요임금이 어질지 않아서가 아니라 개는 원래 그 주인이 아니면 짖기 때문입니다. 그 당시 신은 다만 한신을 알고 있을뿐, 폐하는 알고 있지 못했습니다. 또 천하에는 폐하가 한 것과 같은 일을 하고 싶어하는 사람이 많지만 힘이 모자라기 때문에 못하고 있는 것뿐입니다. 그들을 또 다 잡아 삶을 작정이십니까?」 말 한마디로 천냥 빚을 갚는 다는 말처럼 화가 치밀었던 고조도 괴통의 말이 과연 옳다 생각되어 그를 곱게 놓아 보냈다.


40.琴瑟之樂(금실지락) 琴 : 비파 금, 瑟 : 큰 거문고 슬, 樂 : 즐거울 락. [유사어]琴瑟相和(금슬상화), 如鼓琴瑟(여고금슬), 鴛鴦之契(원앙지계). [출전]<詩經(시경)> 거문고 소리와 비파소리가 화합하듯 부부사이의 화락과 즐거움 부부의 정이 좋은 것. 금슬은 거문고를 말한다. 거문고가 어떻게 부부의 정이란 뜻이 되는가. 말의 유래는 모두 시경에서 비롯하고 있다. 소아 상체편은 한집안의 화합함을 노래한 팔장으로 된 시로, 이 시의 제칠장에 처자의 좋게 합하는 것이 거문고를 치는 것과 같고 형제가 이미 합하여 화락하고 또 즐겁다. 라고 했다. 여기서 금슬을 슬금이라고 바꿔 놓은 것은 운을 맞추기 위한 때문이다. 슬은 큰거문고를 말하고 금은 보통 거문고를 말한다. 큰 거문고를 가락에 맞추어 치듯 아내와 뜻이 잘 맞는다는 것을 말한 것이다. 처자는 아내와 자식이란 뜻도 되고, 아내란 뜻도 된다. 또 같은 시경 국풍 관저편은 5 장으로 되어 있는데. 제 4장에 ' 요조한 숙녀를 금슬로서 벗한다.' 고 했다. 조용하고 얌전한 처녀를 아내로 맞아 거문고를 치며 서로 사이 좋게 지낸다는 뜻이다. 여기서 부부간의 정을 금슬로써 표현하게 되었고 부부간의 금슬이 좋은 것을 금슬상화(琴瑟相和)란 문자로 표현하기도 한다. 금슬이 좋단 말은 결국 가락이 잘 맞는다는 뜻으로 ‘듣기 싫은 부부 싸움이 일지 않는다’는 뜻으로 확대 해석할 수도 있다. 궁금풀이 : 한데 이 '琴瑟'을 한글로 쓸 때는 '금슬'이 아니라 '금실'로 적어야 한다. '琴瑟之樂'도 '금실지락'이지 '금슬지락'이 아님은 두 말하면 잔소리다. 이는 우리 말법 중 하나인 전설모음화의 영향으로, '금슬'보다는 '금실'로 발음하기가 편해 대부분의 언중(言衆)이 '금실'로 소리내고 있음을 살펴 '금실'을 표준어로 삼은 것이다. 그외 : 이처럼 우리말에는 한자말을 한글로 적을 때 한자말의 원래 소리가 변하는 것이 더러 있다. '初生달'도 그 중 하나다. '어두운 밤길에 초생달만 을씨년스럽게 떠 있다'는 우리가 흔히 쓰는 말이지만, 하늘이 두 쪽이 나도 초생달은 뜨지 않는다. 오직 '초승달'만 뜰 뿐이다. 한자말 '生'은 우리말에서 '승'으로 소리가 변하는 예가 더러 있다. '이 生'이 변한 말 '이승'이 그러하고, '저 生'이 변한 말 '저승'도 그러하다. 이 또한 전설모음화의 영향이다. 어수선한 세상을 살아내느라 가뜩이나 복잡한 머릿속에 전설모음화의 문법적 논리까지 담으라고는 하지 않겠다. 다만 '음력으로 그 달 첫머리의 며칠 동안을 이르는 말'은 '초승'이고, 그 때에 뜨는 달은 '초승달'이 바른말이라는 것쯤을 알고 살자. 이 밖에 '陰달'을 '응달'로 쓰는 것이나, '(사람들을) 전쟁이나 난리통에 마구 죽이는 것'을 일컫는 '殺戮'을 '살육'으로 적는 것, 국악에 쓰이는 타악기인 '杖鼓'를 '장구'로 쓰는 것, '술을 마신 뒤 속을 푸는 일'을 뜻하는 '解腸'을 '해장'으로 쓰는 것도 한자의 본음과 한글 적기가 다른 말들의 예이다. 한편, 어떤 낱말은 상황에 따라 한자말의 원래 소리로 적거나 달리 적기도 한다. '怒'는 '성낼 노'자다. 분노(憤怒). 격노(激怒) 등이 '怒'자의 쓰임이다. 한데, 이 '怒'자가 '기쁨과 노여움과 슬픔과 즐거움'을 뜻하는 '喜怒哀樂'에서는 '희로애락'으로, 한글 적기가 달라진다. 이는 활음조(滑音調)에 의한 것인데, '희노애락'보다는 '희로애락'이 말하기 쉽고 듣기에도 좋아 그렇게 적도록 한 것이다. '크게 성내는 것'을 일컫는 '大怒'도 '대노'가 아니라 '대로'로 써야 한다. 결국 '怒'는 받침이 없는 말 뒤에서는 '로'로 적고, 받침이 있는 말 뒤에서는 '노'로 적는다.


41.삼인성호(三人成虎) 三:석 삼. 人:사람 인. 成:이룰 성. 虎:범 호. [준말] 시호(市虎). [동의어] 시유호(市有虎), 시호삼전(市虎三傳), 삼인언이성호(三人言而成虎). [유사어] 증삼살인(曾參殺人), 십작목무부전(十 木無不顚). [출전]《韓非子》〈內儲設〉,《戰國策》〈魏策 惠王〉 세 사람이 짜면 저잣거리에 호랑이가 나타났다는 말도 할 수 있다는 뜻으로, 거짓말이라도 여러 사람이 하면 곧이 듣는다는 말. 전국 시대, 위(魏:梁)나라 혜왕(惠王) 때의 일이다. 태자와 중신 방총(龐 )이 볼모[人質]로서 조(趙)나라의 도읍 한단(邯鄲)으로 가게 되었다. 출발을 며칠 앞둔 어느 날, 방총이 심각한 얼굴로 혜왕에게 이렇게 물었다. "전하, 지금 누가 저잣거리에 호랑이가 나타났다고 한다면 전하께서는 믿으시겠나이까?" "누가 그런 말을 믿겠소." "하오면, 두 사람이 똑같이 저잣거리에 호랑이가 나타났다고 한다면 어찌하시겠나이까?" "역시 믿지 않을 것이오." "만약, 세 사람이 똑같이 아뢴다면 그땐 믿으시겠나이까?" "그땐 믿을 것이오." "전하, 저잣거리에 호랑이가 나타날 수 없다는 것은 불을 보듯 명백한 사실이옵니다. 하오나 세 사람이 똑같이 아뢴다면 저잣거리에 호랑이가 나타난 것이 되옵니다. 신은 이제 한단으로 가게 되었사온데, 한단은 위나라에서 저잣거리보다 억만 배나 멀리 떨어져 있사옵니다. 게다가 신이 떠난 뒤 신에 대해서 참언(讒言)을 하는 자가 세 사람만은 아닐 것이옵니다. 전하, 바라옵건대 그들의 헛된 말을 귀담아 듣지 마시오소서." "염려 마오. 누가 무슨 말을 하든 과인은 두 눈으로 본 것이 아니면 믿지 않을 것이오." 그런데 방총이 한단으로 떠나자마자 혜왕에게 참언을 하는 자가 있었다. 수년 후 볼모에서 풀려난 태자는 귀국했으나 혜왕에게 의심을 받은 방총은 끝내 귀국할 수 없었다고 한다. [주] 방총 :《韓非子》에는 방공(龐恭)이라고 되어 있고《戰國策》에는 방총(龐 )이라고 되어 있음.


42.同工異曲(동공이곡) 같을 동, 장인 공, 다를 이, 가락 곡 [출전]韓愈의< 進學解> 시문을 짓는 기교는 똑같으나 그 곡조(취향)는 다르다. 겉만 다를 뿐 내용은 똑같다 선생이 학생들에게 훈계한다. "설령 세상에서 벼슬자리를 얻지 못하더라도 관직의 불공평을 말하는 것은 좋지 않으며 자신의 학업 닦지 못한 것을 반성하여 책망하고 한층 노력하는 것이야말로 바람직한 자세인 것이다." 그러자 한 학생이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반문했다. "선생님은 모든 학문을 닦으시고 옛날의 대문장가 못지않은 글을 지으시고 인격에 있어서도 전혀 나무랄 데가 없으신데도 사람들의 신임을 못 받으시고 친구분들의 도움도 없고 자칫하면 죄까지 뒤집어 쓸 형편입니다. 그러면서 어떻게 저희들에게 처세의 도리를 말씀하실 수 있습니까?" 선생은 이렇게 대답했다. "공자나 맹자도 세상에 받아들여지지 않아서 불행한 생애를 보냈다.나는 이분들 같은 大聖人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그런데도 벼슬해 녹봉 받아 처자 부양하며 편히 살고 있잖느냐. 그러니 사람들로부터 헐뜯음을 당한다해도 이상할것 없고 지금의 형편도 과분하지." '진학해'에는 또 학생이 선생(한유)의 문장을 칭찬하는 대목도 있다. "莊子(장자) 屈原(굴원) 司馬遷(사마천) 楊雲(양운) 司馬相如(사마상여)의 문장이 '다같이 교묘하지만 취향은 달리한다(同工異曲)'선생의 글도 그와 같다할 수 있다." 오늘날에는 同工異曲이 당초와는 달리 겉만 다를 뿐 내용은 똑같다는 의미로 경멸의 뜻을 담아 쓰이고 있다


43.양두구육(羊頭狗肉) 羊:양 양. 頭:머리 두. 狗:개 구. 肉:고기 육. [원말] 현양두 매구육(懸羊頭賣拘肉). [동의어]현양수매마육(懸羊首賣馬肉), 현우수(매)마육[懸牛首(賣)馬肉]. [유사어] 양질호피(羊質虎皮), 현옥매석(衒玉賣石). [출전]《晏子春秋》,《無門關》,《揚子法言》 밖에는 양 머리를 걸어 놓고 안에서는 개고기를 판다는 뜻. 곧 ① 거짓 간판을 내검. ②좋은 물건을 내걸고 나쁜 물건을 함. ③ 겉과 속이 일치하지 않음의 비유. ④ 겉으로는 훌륭하나 속은 전혀 다른 속임수의 비유. 춘추시대, 제(齊)나라 영공(靈公)때의 일이다. 영공의 궁중의 여인들에게 남장(男裝)을 시켜 놓고 완상(玩賞)하는 별난 취미를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이러한 취미는 곧 백성들 사이에도 유행되어 남장한 여인이 날로 늘어났다. 그러자 영공은 재상인 안영(晏孀:晏子)에게 '궁 밖에서 남장하는 여인들을 처벌하라'는 금령을 내리게 했다. 그러나 유행을 좀처럼 수그러들지 않았다. 영공이 안영에게 그 까닭을 묻자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전하께서는 궁중의 여인들에게는 남장을 허용하시면서 궁 밖의 여인들에게는 금령을 내렸사옵니다. 하오면 이는 '밖에는 양 머리를 걸어 놓고 안에서는 개고기를 파는 것[羊頭狗肉]'과 같사옵니다. 이제라도 궁중의 여인들에게 남장을 금하시오소서. 그러면 궁 밖의 여인들도 감히 남장을 하지 못할 것이옵니다." 영공의 안영의 진언에 따라 즉시 궁중의 여인들에게 남장 금지령을 내렸다. 그러자 그 이튿날부터 제나라에서는 남장한 여인을 찾아볼 수 없었다고 한다


44.양포지구(楊布之狗) 楊 : 버들 양, 布 : 배 포, 狗 : 개 구. [출전] 韓非子. 양포라는 사람의 개. 겉이 달라졌다고 해서 속까지 달라진 걸로 알고 있는 사람을 가리켜 양포지구라고 한다. 楊朱(양주)의 아우 楊布(양포)가 아침에 나갈 때 흰옷을 입고 나갔었는데, 돌아올 때는 비가 오기 때문에 흰옷을 검정 옷으로 갈아입고 들어왔다. 그러자 집에 기르고 있는 개가 낯선 사람으로 알고 마구 짖어댔다. 양포가 화가 나서 지니고 있던 지팡이로 개를 때리려 하자 형 양주가 그것을 보고 양포를 이렇게 타일렀다. 개를 탓하지 마라. 너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만일 너의 개가 조금 전에 희게 하고 났다가 까맣게 해 가지고 들어오면 너는 이상하게 생각지 않겠느냐? 양주는 전국시대 중엽의 사상가로 묵자와 대조적인 사상을 주창하고 있었다. 묵자는 온 천하 사람을 친부모 친형제처럼 사랑하라고 외친 데 대해 양주는 남을 위하여 그런 부질없는 짓은 그만두고 저마다 저 하나만을 위해 옳게 살아가면 천하는 자연 무사태평한 법이라고 주장했다.


 

 [출처] https://blog.naver.com/weeoh 작성자 weeoh